1026_마드리드 2일차
십일일째. 여행의 1/3이 지났다. 파리에서의 시간은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 생각나는 침체된 것이었다. 마드리드는 열정의 도시답게 낮보다 밤이 아름답다. 24시간 식당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고 거리에서 버스킹하는 음악가들도 파리의 그들보다 흥겹다.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여행객들에게 미소로 화답하는 유쾌한 도시다.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여행의 묘미가 있다. 지친다고? 홀로 여행을 떠난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진의 고통이 내겐 아직 없다. 숙소에서의 머묾도 내게 휴식을 주고, 낯선곳에서 낯선 이와의 만남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가지 문제는 돈이다. 예산이 점점 떨어져간다. 생각보다 돈 드는 일이 많고, 이로 인해 도시의 대표음식은 지나쳐야 할 때가 있다. 동시에 돌아가서 재취업도 걱정이다. 현재를 즐기지 못한 과거를 후회하고 있으면서 나는 오늘도 미래에 살고 있다.
아침 일찍 JCB 카드 가맹점을 찾았다. 햄버거가 먹고 싶어 맥도날드를 갔다. 결제 실패. 그저 발길을 돌려 마드리드 시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몇개의 거리 공연을 봤다. 유럽, 특히 마드리드의 버스킹은 수준이 달랐다. 그야말로 공연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버스킹은 그저 노래자랑 수준이다. 스페인에서는 혼자 보다 그룹으로 공연을 했다. 기타를 치거나 바이올린, 첼로, 섹소폰 등을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성악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름 모를 밴드의 공연을 촬영 중 가수 분이 내 핸드폰에 달려와 노래를 불렀다. 그야말로 황홀했다. 영국 음악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가 말했다. '중요한 건 사운드와 리듬이다. 가사는 그 다음'이라고. 스페니쉬를 못하지만흥이 났다. 음악이다. 곳곳에서 버스킹을 들으며 시장으로 향했다.
하몽 샌드위치 두개를 먹었다. 카드 결제가 안됐지만 그냥 먹었다. 하몽은 나에게 너무 짰다. 잘 쳐줘도 그저 그랬다. 마드리드 시장은 보기엔 이쁘지만 맛은 특별하지 않다. 산 히네스 성당을 찾았다. 미사 시간이라 입장이 불가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나오는 길에 한 동양인 그룹을 만났다. 영어로 '지금은 미사 시간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
중국인들인 줄 알았는데 한국분들이셨다.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는 목소리에 반가움을 느꼈다. 어제 한식당 주인 아주머니를 만날때도 그렇고, 한국인과 대화하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성당 구경은 나중으로 미루고 영화관을 갔다. 스페인 영화밖에 없다. 스페인 영화시장은 나름 큰 편이라 영화제작도 많은 가 보다. 현재 볼만한 미국 영화가 없는 것도 이유가 되겠다. 한식당을 갔다. 카드 결제가 된다. 밥은 굶지 않겠다.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공기밥 추가는 2유로를 내야 했다. 2,600원 쯤. 다음부턴 미리 추가해서 카드로 결제를 해야겠다. 맛은 좋았다. 배도 부르고 담배를 태운 뒤 거리를 걸었다. 다른 성당을 찾았지만 데이터 고갈로 구글 맵이 정확하지 않았다. 자라에 들렀다.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기대했던 대부분은 그저 그랬다. 모든 행운은 우연과 함께 찾아온다.
우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위치가 시내 가운데라, 쉬었다 다시 나갈 수 있다. 위치의 중요성을 다시 깨듣는다. 쉬고 샤워를 했다. 감바스나 먹으러 가볼까 해서 나왔다. 꽤 멀리 위치한 맛집은 카드결제가 되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보니 가방이 열려있다. 오는 길에 뒤따라 나오던 수상한 몇 놈이 있었다. 손에 쥐고 다니던 수첩이 가방에 있었다. 카드와 약간의 현금이 들어있다. 꼭 이런 일은 공교롭다. 확인해 보니 수첩은 무사했다. 수상함을 느낀 내가 이리저리 움직여서 제대로 못 훔친 모양이다. 스페인 칭찬을 많이 했더니 이런 실망을 주는 구나.
가끔 운명이 날 가지고 논다는 생각을 한다. 난 기대를 많이 하거나 강하게 바라는 게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거기서 좋은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바라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고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징크스가 생겼다. 이름 때문인지, 팔자가 사나운 건지. 돌아가면 개명을 생각해 봐야겠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식당에 들러 불고기를 샀다. 가져온 소주를 마셨다. 노트북으로 응사 시리즈를 봤다. '쓰리기'가 '빙그레'에게 하는 말이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5년 전 봤을 때와 느낌이 또 다르다. 5년 후 나는 오늘을 돌아보며 무엇이 아쉬울까.
우울함과 센치함이 섞여 담배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