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_마드리드 사일차
벌써 마드리드도 내일이면 마지막이다. 사실 이 일기는 3일 후인 31일에 쓰는 거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오늘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여행이 2주를 지나가고 있고, 알 수 없는 아니 사실 알만한 중압감과 책임감에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알게 모르게 심신이 고달프다. 시간 아깝다고 몸은 혹사시키지 말라던 지인의 충고를 핑계삼아 전기장판을 가동시키고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피우기로 했다. 멀쩡한 집 놔두고 먼 스페인 한 아파트에서 뒹굴거리고 있다니, 돈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다.
내 게으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욕구는 식욕이다. 점심 때가 되니 슬 나가고 싶어졌다. 빵이 먹고 싶다. 눈여겨보던 집 앞 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마트는 파리보다 낮은 마드리드의 물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크로와상 하나에 1유로가 채하지 않고, 기계에서 직접 짜주는 쥬스도 3유로를 넘지 않았다. 이것저것 담은 내 카트의 금액이 6유로를 넘지 않았고, 낮은 물가에 높은 만족감으로 거리로 향했다. 예산은 벌써 다 떨어지고, 쇼핑은 커녕 친구들에게 나눠줄 기념품도 못사갈 지경이다.
숙소에 들러 물건을 두고, 잠시 쉬다 영화관으로 향했다. 도시마다 영화관에서 영화 관람하기라는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8유로 남짓했다. 만족스러운 가격에 비해 시설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그래도 스페인 영화시장이 양질의 작품을 생산해내는 나름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비디오방 같은 스크린과 사운드, 높낮이 차이가 없는 좌석까지 이런 곳에서 영화를 보는 현지인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유럽인들은 우리나라 영화관에 오면 눈이 휘둥그레 지겠구나 싶으면서 물가를 따져도 8, 9유로 가격에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국내 영화관이 그리워졌다.
어쨌든 마드리드 영화관 체험을 마치고 한식당으로 향했다. 마지막 마드리드 밤을 혼술로 보내기로 했다. 시끌벅적한 밤보다는 센치한 저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불고기와 밥을 사고, 미리 사둔 라면을 끌여 남은 소주와 함께 먹었다. 뭘 가지러 주방에 갔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단지 복도에서 호스트 크리스티나와 마주쳐 영화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 뿐이다. 이미 소주를 한병반 마시고 알딸딸했던 나는 영화관에 간 이야기를 건네며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까진 몰랐다. 크리스티나가 영화광이란 것을. 스페인 영화에 관심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몇개의 스페인 영화에 대해 추천해줬고, 한국에서 영화 평론가를 준비중이라고 하자 상기된 듯 보였다. 영화를 공부한 친구가 오는 중이라고 하며 소개시켜주겠다고 했고, 한 스페인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4,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친구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질 않는다. 매너가 좋았고, 영화에 대해 많이 아는 듯 했다. 국내 영화 <사라진 밤>의 원작 <더 바디>와 <인비져블 게스트>의 감독 오리올 파울로, 작년에 개봉한 <더 바> 정도밖에 모르는 나에게 수많은 스페인 영화를 알려주는 두 사람이 술기운 때문인지 재밌게 보였다. 특유의 맞장구로 그 많은 설명을 들은 나에게 크리스티나는 요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혼술 중이던 나는 두 사람의 파티에 합석했다. 메뉴는 홍합 요리와 감자칩이었다. 한국의 홍합탕과 비슷한 그녀의 홍합 요리는 그야말로 술국이었다. 타바스코 소스와 몇가지 오일을 섞어 버무린 감자칩은 스페인 특유의 맛이 나는 듯 했다. 남은 소주를 그들에게 알려줬고, 맛을 본 두 사람은 표정과 다르게 맛있다고 칭찬했다. 방에서 창문 밖으로 몰래 피던 담배는 크리스티나의 제안으로 주방에서도 필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다. 우리 세 사람은 요리와 술, 담배를 나누며 재밌는 밤을 보냈다. 역시 마드리드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