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십구일날

1103_로마에서 베네치아로

by Simba

여행객과 여행지그리고 숙소는 궁합이 있는 것 같다. 유럽이라고 해서 모든 여행지가 환상적이고, 모든 사람이 친절하고, 모든 숙소와 호스트가 마음이 맞는 것은 아니다. 나에겐 로마의 숙소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곳과 조선족이 운영하는 곳은 세심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고, 앞으로 숙소를 결정할 때 고려사항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일간의 머묾동안 정이라는 게 들었나보다. 사장에게 나를 '혼자 온 남자애'라고 부르던 매니저격의 여자 직원을 빼고 식당 이모는 오늘 가냐며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 여행객과 말을 별다르게 섞지도 않았지만 식사가 불편하진 않았다. 군대 짬밥같은 이곳의 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로마는 마드리드 보다는 편하지 않고, 파리보단 좋았다. 비를 핑계로 숙소에 머문 시간이 많았고, 약간의 우울감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런대로 좋았다. 몇년의 꿈이었던 로마 스토어에서 모자 하나를 사고 밋업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등 좋은 점도 있었다. 로마의 피자와 라자냐는 특별하지 않았고, 젤라또와 초콜릿은 의외로 특별했다.


이제 베네치아로 간다. 한 국가에서 두 도시를 머무는 건 이탈리아가 유일하다. 덕분에 캐리어와 백팩의 짐을 구별하지 않아도 된다. 공항의 세관을 통과하지 않기 때문에 물건을 뺏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 산 모자를 돌려 쓰고 바로 앞 테르미니역으로 이동했다. 여유를 부린 탓에 살짝 빠듯했다. 처음으로 플랫폼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테르미니 인포메이션 직원들은 방향만 손으로 알려줄 뿐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12번 플랫폼을 찾아가란 말에 간 곳에서는 30분 연착된 기차를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30분을 기다리는 동안 미뤘던 영어 공부를 잠시 했다. 난 자투리 시간 활용을 잘한다. 엄밀히 말하면, 자투리 시간만 잘 활용한다. 큰 여유와 시간이 주어지면 곧장 게을러지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천상 뒷북 스타일이다. 20분, 30분의 여유가 주어지면 뭔가를 하고 싶어 뒤지기 시작한다. 그 시간이 아깝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영어공부를 하거나 신문을 읽는다.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해서 메모를 하기도 한다. 이동이 많은 일이 맞을 지도 모른다. 자투리 시간이 많이 발생해야 스스로에게 영감 주는 기회도 많은 듯 하다.


기차 내부는 굉장히 깔끔했다. 옆자리 이탈리아 아저씨도 친절하시고 2시간이 조금 넘는 기차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늦게 잔 탓에 잠을 조금 자고 노래를 들었다. 베네치아 기차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이색적이었다. 수상 버스를 타고 20여분을 들어가는 순간은 '베네치아'라는 여행지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비가 오지 않은 날에 지는 저녁 노을과 아름다운 건축물은 조화롭게 어우러져 찍어대는 사람들의 사진소리를 맞아주기 충분했다. 추측컨데, 미국인이 많았다. 선착장에서 만난 미국 누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고, 서로 사진을 찍어줬다. 성격 좋아보이던데, 인스타 계정이라도 물어볼 걸. 혼자 하는 여행은 우울함을 낳고, 우울함은 인생을 복기하는 기회를 준다. 베네치아에서는 마냥 우울할 수 없을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태어나 본 광경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축복받은 인간들의 세상.


숙소에 짐을 풀고 라면과 밥을 주문했다. 5유로면 배를 채울 수 있어 돈을 아껴야하는 나에게는 딱이었다. 세탁도 5유로를 주면 건조까지해 다음 날 준단다.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가장 가치있는 10유로를 썼다.


밥을 먹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가장 재밌는 일인 구석 살피기를 했다. 곳곳에 숨은 상점을 구경하고 카페, 젤라또가게에 들러 맛을 보고, 마트를 둘러보고 성당을 간다. 사람들은 사진을 남긴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단다. 난 다르게 생각한다. 사진은 찍으면 한 번 보고 끝이다. 인생샷을 남기지만 그마저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결국 허영심에 깃댄 결과다. 남는 건 기억밖에 없다. 느끼고 보고 먹고 이야기하고. 광안리에 살 때 광안리로 여행오는 여행객들이 찾아가는 명소는 현지인인 내가 거의 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광안리의 진짜 분위기를 알고 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지의 참맛을 알려면 스팟에 들러 사진을 찍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저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있거나, 거리를 걷거나, 상점에 들러 소소한 재미를 찾는 일. 머묾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백미다.


숙소로 돌아온 진정한 한인 민박의 분위기는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여자 여행객들은 테이블에 모여 와인이며 맥주를 따고 있었고, 남자 여행객들은 침대위에서 폰만 보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쉬었다. 잠이 몰려왔다. 잠이 오면 일찍 자는 것도 좋겠다 싶어 잠시 누웠다. 잠이 들진 못했다. 사온 와인을 마시면 좋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테이블엔 자리가 없었다. 가만히 보니 여자애들도 둘, 셋씩 같이 온 사람과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리된 분위기.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은 뒤 자리를 잡았다. 어색했다. 마트에서 산 새우 꼬치는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싼 와인과 새우 꼬치, 어색한 분위기. 환상적인 베네치아의 첫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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