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_로마 5일차
십팔일째. 유럽 어느 나라를 가든 적응은 하루면 충분했다. 떼르미니 역 앞의 한 한인민박집은 몇달을 지낸 듯 익숙했고, 스페인 광장을 중심으로 한 로마 시가지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아침을 먹으려 알람을 맞추고 눈을 뜨는 건 마치 군대의 주말을 떠올리게 했다. 가장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유럽 여행 중 군대 생활을 떠올리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쨌든 오늘도 안경을 얹고 옆 건물로 갔다. '안녕하세요!' 너스레를 떨며 자리를 잡았다. 식당 아주머니는 오늘 떠나냐며 말을 걸었다. 하루 더 머물고 내일 간다고 말하며 낯선 정겨움이 느껴졌다. 유독 차가운 이 곳의 공기에서 아주머니의 퉁명한 질문은 황량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적셔준다. 차가운 아침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비가 와서인지, 나이가 서른을 넘어서인지, 보름이 넘은 여행의 고단함인지, 강한 의지가 부재한 여행의 불분명함때문인지 들리는 듯한 주위의 탄식을 뒤로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어쩌라고. 피곤하다.
11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몸이 찌뿌둥하다. 날씨도 그러했다. 나갈 채비를 했다. 로마의 날씨는 유럽의 우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곧 비가 올듯한 습도와 준비한 우산을 비웃는 햇살, 그 사이의 상쾌함을 가르며 숙소를 나왔다. 가까운 거리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몇 군데를 고민하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마드리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도 길거리에 손님을 잡는 여리꾼들이 레스토랑마다 있다. 이상하게 들어오라고 붙잡으면 들어가기가 싫다. 그 중 붙잡지 않는 식당은 왠지 끌린다. 인간의 청개구리식 속성은 미묘한 마케팅적 효과를 발휘한다. 자리에 앉아 해산물 리조또를 시켰다. 피자는 어제 먹었고, 파스타와 리조또 중 리조또를 선택했다. 같이 주문한 콜라는 나오지 않고, 리조또는 왠 조개 몇개와 불그레한 밥들이 산재했다. 리조또는 실패. 맛집을 찾아 다니진 않았지만 로마의 일반적 레스토랑 음식은 한국 이탈리아 식당에 비해 나을 게 없다. 아니 오히려 못하다. 어쨌든 열심히 먹고 에스프레소를 한잔 시켰다. 유럽의 돈은 4유로까지 동전이라, 마치 큰 돈을 쓰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에스프레소 한잔에 2유로라치면, 동전 두개라서 가볍게 느껴지지만 사실 2천원이 넘는 돈이다. 그렇게 빠져 나간 돈들이 이 여행을 더 힘들게 만든다. 어쨌든 오늘도 커피에 담배를 맛있게 태우고, 여정을 시작했다.
오늘은 그래도 바티칸과 콜로세움을 가 볼 작정이다. 예산 부족으로 투어는 못하지만, 흐린 날을 벗삼아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바티칸은 노트르담과 큰 차이가 없었다.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늘어선 행렬과 줄지은 상점들, 사진찍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거나 하는 엄청난 행운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종교의 덧없는 허망처럼 대표 여행지는 큰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지난 몇달간 세계사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콜로세움도 큰 여운을 남기진 못했다.
여행을 즐기는 각자의 즐거움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 모두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같은 숙소에서 잠을 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느낌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전체주의적 시각이다. 인생샷을 찍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 올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단지 '유럽여행', '세계일주'등의 타이틀을 가지고 하나의 목표를 리스트에서 삭제해 가는 것. 인정욕구에서 발현된 목표주의적 여행은 그들의 만족감을 달래주는 하나의 스타일이고, 작은 상점을 살피고 거리의 악사를 멍하니 바라보고, 이름모를 카페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그저 떠나옴을 느끼는 여행은 나만의 스타일이다.
나는 아무래도 바티칸이나 콜로세움보다 로마의 골목이 좋았다. 30분이 넘는 길을 굳이 걸어서 돌아왔다. 서울이라면 하지 않았을, 거리의 상점을 하나하나 살폈다. 여행객을 대상으로 똑같은 가공품을 팔아대는 바티칸의 수많은 기념품 가게들이 아닌 골목에 위치한 티라미수 가게, 공예품을 파는 시크한 잡화점, 거스름돈을 굳이 동전으로 주던 'conad'마켓등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시 AS로마 스토어였다. 모자를 사야겠다. 바티칸 투어를 할 돈도 없는 지금이지만, 몇년의 기다림을 허비할 순 없다. 투어보다 팀의 모자가 그리운 게 축구팬의 심정이자 충성심이다. 몇개의 디자인 중 봐두었던 하나를 선택했다. 가장 앞의 모자를 들고 써봤다. 마음에 든다. 결정을 하고 20여분간 결제를 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깨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에게는 모난 성격적 각(角)이 있다. 물건을 살 때 가장 앞의 물건은 사지 않는다. 아무래도 가장 때가 탄 '듯한' 찝찝함 때문이다. 옷가게에서 피팅해본 옷을 두고 굳이 창고에서 새 옷을 달라는 사람들을 보면 비단 나 혼자의 병은 아니라고 본다. 결벽증. 내게 청결함을 동반한 결벽적 완벽함은 없지만, 몇몇 부분에서 그런 까다로움이 남아있다. 옛 여자친구와의 관계에도 그러한 각(角)들이 솟아났었기에 고치고 싶었다. 안쪽에 있는 깨끗한 모자가 집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스스로 '더럽다'고 느낀 첫번째 모자를 사고 돌아간 후 후회할 내가 그려졌다. 다. 동시에 스스로를 깨지 못한 나를 한심스러워 할 나도 보였다. 20분을 모자를 썼다 벗었다 했다. '할 수 있다', '그냥 사고 나가자'. 결국 안쪽의 모자는 집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첫번째 모자를 사고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참 별스런 고민처럼 보이겠지만, 스스로를 깨는 건 작은 부분에서 시작한다. 잘못 정립된 습관들은 외면하는 순간 커지고 커진다. 마주치고 깨트릴 때 고통스럽지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깨트리고 깨트려서 없애볼 생각이다. 일단 오늘은 성공했다.
32유로인 줄 알았던 모자는 스캔하자 22유로가 떴다. 계산하던 직원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다급히 다른 직원을 부르니 아마도 '스캔된 가격'으로 계산하면 된다는 듯 이야기하는 듯 했다. "I thought it would be 32 euro.", "yes, but ... ". 22유로를 카드로 계산하고 가게를 나섰다.
바로 옆 젤라또 가게로 갔다. 로마를 떠나기 전 젤라또는 먹고 가야겠다. 인생 젤라또였다. 그 식감과 초콜릿의 깊이는 처음 본 맛이었다. 마치 떡처럼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초콜릿은 진하지만 달콤했다. 나중에 느꼈지만 모든 이탈리아 젤라또가 그렇진 않았다.
역시 여행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