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_베네치아 사일차
유럽의 우기는 내 여행을 울적하게도, 쉴 수 있는 여유의 핑계도 되어 주었다. 바삐 움직여야 하는 유럽여행은 나에게 일종의 의무감을 부여했고, 부담스러운 마음의 압박감에 베네치아의 하늘은 단비를 내려주었다. 여느때처럼 화려하고 정갈한 숙소의 아침을 먹고, 여행 브리핑을 들으러 거실로 향했다. 몇일 새 친해진 몇몇 동생 여행객들이 떠나는 날이라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그들도 정 많은 한국인이지만 어딘가 경계의 눈빛도 보인다. 유럽의 외딴 국가에서 만나 동행하고 같이 밥을 먹고, 정보를 공유하는 한국의 여행객들은 각자의 이유로 함께 할 사람들을 찾지만, 이면에 이질적인 모습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외로워서, 사진 찍어 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순수한 의도로 혹은 불순한 의도로 함께 만나 여행하는 사람들은 밝은 얼굴 뒤로 여행의 고됨이 비친다.
여행 브리핑을 들으면 결론은 하나다. 베네치아의 날씨는 여행객의 마음과 같다. 비가 오기도 하고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한다. 오늘도 비는 올 예정이지만 어제처럼 언제 개어서 숙소에 머문 여행객 마음을 흔들지 모른다. 숙소에 같이 머무는 동생 한명에게 부라노를 같이 가자고 했다. 베네치아 본섬 근처 여러 섬 중 가장 유명한 섬으로 "부라노를 가지 않으면 베네치아를 본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여행객 사이에 있을 정도다. 아이유의 뮤직비디오 배경으로 유명해진 이 섬은 베네치아 어디든 그렇듯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고, 부탁한 돈을 입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단 빌려서라도 가보자. 같이 간 동생은 나이가 참 어렸다. 23. 나보다 10살이 어린 동생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딱히 존중의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남을 하대하면 책임도 함께 한다. 말을 놓고 위계를 세우면서 밥 한번 사지 않는 형들을 보면 차라리 거리를 두고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난 성인이 된 누군가에게 말을 쉽게 놓지 않았다. 꼭 술을 한잔 하고 말을 놓겠다 허락을 구한 후 말을 놓았다. 싫은 사람에겐 일부러 더 하대하지 않았다. 뭐 일종은 규칙같은 거.
부라노 섬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하지 않았다. 배를 잘못타서 몇번을 갈아타야 했지만, 수상버스를 타는 재미는 생각보다 괜찮다. 도착해서 내린 부라노 섬은 수채화 속 마을과 같았다. 알록달록한 집들과 화창한 하늘은 이 섬의 유명세를 이해할 정도였다. 예쁜 것을 보면 볼 수록 가족 생각이 많이 난다. 유럽은 가족과 함께. 좋은 것 많이 보고 맛있는 것 많이 먹어도 혼자면 무슨 쓸모가 있으랴. 공유할 사람이 있어야 재미도 배가 되는 법이다.
단 하나, 부라노 섬이 환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너무 많은 한국인 관광객 때문이다. 연인끼리 사진을 찍는 모습은 국적을 떠나 너무 예쁘지만, 색깔별 담벼락 아래 사진을 찍어대는 한국인들은 이 아름다운 섬에 어울리지 않는 SNS중독자들 같았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저렇게 목적지향형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가장 많지 않을까.
물론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 서로 찍어주고 하는 재미가 있었다. 약간은 동행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부라노 섬은 다시 오진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 유명해져 한국인 관광객으로 들끓는 관광지는 나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나도 남들처럼 리스트 하나를 지우고 돌아오는 길에 동생과 비알토 다리, 추천받은 시장, 산 마르코 광장을 돌았다. 검색해서 찾아간 파스타 집은 브레이크 타임으로 손님을 받지 않았고, 배고픈 마음에 대충 들어간 피자집에서 각자 커다란 피자 한조각과 콜라하나를 시켰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동생을 보면서 영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유럽인들은 기본적으로 아시아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아시아 관광객은 그들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중국, 일본, 한국의 경제력이 인종 차별을 약하게 할 요인도 되었다. 단, 상점에서 물건을 주문할 때 영어 혹은 자국어가 아닌 다른 국가의 언어로 이야기하거나 말을 못하면 표정이 달라진다. 무시보다는 존중의 마음이 없다에 가깝다. 중국어로 주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친절히 답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인상을 찌푸리고 되묻거나 무시할 뿐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또래의 남자 한명이 새로 들어왔다. 저녁으로 먹을 파스타 집을 검색하고 같이 가자고 했다. 남자 셋이서 파스타를 먹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이런 조합도 나쁘진 않았다. 의료 영업을 했다는 친구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사람이 착했고, 여자 친구가 있지만 퇴사 후 유럽으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시간이 있었다면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연락처는 묻지 않았다.
내일은 또 이동을 한다. 프라하로 간다. 여행의 계획 중 유일하게 휴식을 작정한 도시다. 숙소도 호텔. 눈치보지 않고 실컷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