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하는 구속, 유랑하는 자유

클로이 자오, <노마드랜드>

by Simba

'펀'은 네바다 주 엠파이어 지역의 주민이었고, 남편 '보'와 평범한 결혼생활을 '영유'하던 여성으로 추정된다. 엠파이어 지역은 전통적인 석고보드 생산 공장이 몰려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펀과 보는 'US Gypsum'이라는 회사의 노동자였던 것 같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석고보드 수요 감소로 공장이 문을 닫자, 엠파이어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보가 죽은 후 펀 역시 생필품을 팔아 '밴' 하나를 구입해 '노마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의 시작에서 2018년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카오스>를 떠올렸다. 두 영화는 아주 다르다. 하지만 그 시작은 비슷하다. <아메리칸 카오스>는 금융 위기, 지구 온난화 등으로 몰락한 미 동부의 웨스트 버지니아 등 석탄 생산 지역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트럼프주의'를 조명한다. 주인공이자 감독인 '짐 스턴'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노동자 층을 인터뷰하며 무지한 그들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아메리칸 카오스>는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의 이론적 원리를 영화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노마드랜드>의 노마드들은 <아메리칸 카오스>의 실직자들과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노마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마드들의 현실이 2008년 금융 위기 때문이라는 형이상학적 사유보다, 그 실체적 현상을 말하려는, 보다 자연주의적이며 또한 사실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영화는 수미쌍관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처음의 이미지와 끝의 이미지가 동일하거나 흡사한데, 결국은 그 사이 나타나는 펀의 이야기를 즐기는 식이고, 또한 그로 인해 펀의 과거와 미래를 유추하는 것이 관객의 숙제로 남는다. 펀은 노마드 생활의 시작과 더불어 아마존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노마드, 즉 유랑자들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는 현실의 그것이라, 노동은 필수적이다. 아마존을 비롯한 일련의 기업들은 노마드들에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일거리를 주는 곳으로 표현된다. 어쨌든 아마존에서 노동을 하게 된 펀은 잠시 머무를 곳을 찾게 된다. 노동이 끝나고 휴식을 하던 중 펀은 마트에서 '오브리'라는 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딸들과도 조우한다. 오브리의 둘째 딸은 펀과 일종의 사제지간으로 보이는데, 학교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이 소녀에게 펀은 시를 가르쳐주곤 했던 것 같다. 자신에게 배운 시를 여전히 기억하냐는 질문에 소녀는 즉각적이고 기계적으로 읊어내는데, 내용이 흥미롭고도 익숙하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And all of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


우리의 모든 어제는 바보들에게 불을 밝힌다.


덧없는 죽음으로 가는 길.


꺼져라, 꺼져, 짧은 촛불이여.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중 독백에 해당하는 이 구절은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시로 많이 인용되고, 또 인식된다. 펀은 이 구절을 소녀의 입을 통해 다시금 전해 듣고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한 편으로는 펀을 연기한 '프랜시스 맥도맨드' 자신의 감정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펀'이라는 이름 자체가 맥도맨드의 아이디어이기도 하고, 노년에 유랑하는 삶을 꿈꿨던 그녀이기 때문이다. 맥베스의 독백은 맥도맨드의 남편 조엘 코엔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 에드 톰 벨의 꿈 이야기와 일부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드 톰 벨은 아내에게 꿈 속에서 만난 아버지를 이야기하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지나쳐 가며, 횃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둡고 추운 곳에서 자신을 맞아 줄 것이라 말한다. 흔히 영화에서 '불'이라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과거 세대의 '지혜'를 뜻하는 것 같은데, 물론 <노마드랜드>의 펀은 일종의 염세주의적 의미로 이 독백을 해석하는 듯 하다.



<노마드랜드>를 보면 대중적인 기호를 가진 대다수의 관객은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일명 '일화의 집합'이다. 위에서 언급한 오브리와의 만남도 펀의 일화 중 하나이며, 이후 이어지는 여러 일화들이 줄기차게 열거되면서도 모종의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영화는 펀이 아마존에서 노동을 하거나, 린다 메이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다 갑자기 밴에서의 생활을 비추는 가 하면, RTR이라는 집단의 이야기를 끌어 오기도 한다. 노마드들의 각자 이야기를 소개하다가도, 또 다시 어딘가로 떠나는 펀을 조명한다. 이렇게 일화의 '연결고리'가 부재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연개성을 상실한 관객들은 영화의 매력을 잃고 만다.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비평가들에게는 훌륭한, 작품으로서는 수상 가능성이 높은 영화적 영화이면서도, 대중에게는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그들만의 영화가 되어버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지루함'을 조금 덜어주는 일화가 펀과 '데이브'의 로맨스다. 데이브 역을 맡은 '데이빗 스트라탄'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를 제외하면 유일한 배우이기도 한데, 젠틀하면서 매력적인 중년 남성 노마드다. 사실 <노마드랜드>를 이해하는 나의 키워드는 자유와 기생(寄生)인데, 데이브는 일종의 유혹과 같다. 말인즉, 데이브는 펀에게 정착에 대한 유혹이다. 여기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유'를 말하고 싶은데, 이 지점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유를 절대적으로 상실한 사피엔스들이다. 예컨대 만 년 전 인류는 채집생활을 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던 존재였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지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 갈 수 없는 곳이 없고, 먹을 수 없는 것이 없는 노마드였으며, 자유인이었다. 농업혁명 이후 인류는 국가와 사회의 규약 속에 제도라 칭해지는 수많은 약속을 강요받고 또 교육받으며 파란색과 빨간색의 허락 없이 길을 함부러 건널 수 없고, 정해진 시간에 학교와 회사를 가지 않는 한 생존할 수 없는 생활의 자유도 잃으며,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자유 또한 상실했다. 마치 아주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듯 사고하는 현대의 사피엔스들은 만 년 전 노마드와는 달리, 사실 구속되고 억압된, 소비적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펀은 우선 주거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 역시 매우 수동적이다. 엠파이어 지역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개인적 존재의 가치는 위치적 그것과 아주 맞닿아 있어서, 엠파이어의 가치가 사라지자 그녀는 강제적 노마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이 대개 그러하듯, 자유를 맛본 펀은 유랑 생활을 지속하고자 한다. 한편 데이브는 펀에게 매력을 느끼고 끊임없이 접근하고 또 구애한다. 노마드 생활을 청산하고 아들의 집에 정착하게 된 데이브는 펀에게 정식으로 다시금 주거의 구속, 즉 안정을 제안한다. 내가 말한 키워드 중 '기생'은 바로 이 곳에서 발생한다.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인데, 펀의 노마드 생활을 주거적 자유라고 일컫는다면, 그녀의 과거, 그리고 절대적 다수의 현대인들의 생활은 기생이라고 할 수 있다. 펀은 엠파이어의 US Gypsum에서 남편과 일하며 생활했는데, 그 자체가 기생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회사와 사회, 토지와 건물에 기생하며 자유를 포기하고 안정적으로 생활한다며 자위한다. 데이브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이고 현명해 보이지만, 자유를 맛본 펀에게 기생하는 삶으로의 회귀는 위험해 보일 뿐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을 시험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아주 어렵다. 펀은 자유를 영속할 능력도, 또 용기도 충분하지 않다. 일례로, 그녀는 결국 생존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고 한시적으로 찾아오는 아마존의 일자리를 아주 감사하게 여긴다. 밴에 문제가 생기면 부족한 자금 때문에 동생 '돌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노마드' 현상은 그 이유를 떠나 만 년 전 인류가 누렸던 주거적 자유를 일생에 잠시라도 영유하려는 사피엔스의 본능을 잘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것을 단면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고, 이는 한국인의 정서와 아주 이질적이기 때문에 유념하고 잘 살펴야 할 문제다.





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 두 개만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일몰'과 '물'이다. 영화를 보면서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연상하고는 했는데, 그것은 바로 저무는 해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표출한 영화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일출과 일몰은 그 색이 참 닮았으면서도, 자아내는 정서적 의미가 다르다. 일출은 비록 '희망'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하루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가지는데, 일몰은 그 자체로 하루의 끝도 아니면서, 저묾을 암시하는 일종의 예고를 시사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험적 우울함, 그리움과 애틋함, 애환 등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보랏빛 매직캐슬을 드리우는 일몰이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오버랩되면서 묘한 아련함을 남겼는데, <노마드랜드>의 일몰은 펀의 상황과 표정이 교차되며 그야말로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씁쓸함을 선사한다. 인생의 덧없음, 염세주의적 진리 따위의 것들이 이 일몰의 이미지로 바뀌며 '클로이 자오' 감독의 무차별적인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느낌이다. 물의 이미지는 좀 더 구체적이다. 노마드라는 것이 결국 유영(游泳), 혹은 유랑(流浪)하는 인간인데, 이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물의 습성과 일치한다. 영화는 이를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바로 흐르는 계곡에 몸을 맡긴 펀을 통해서다. 이 장면을 통해 펀은 노마드로서 누리는 자신의 자유를 깨닫고, 진정한 유랑인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인다. 또한 부수적으로, 그리고 조금은 어색하게, 영화는 별과 인간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앞서 말한 듯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이 월 드럭의 거대 공룡을 보던 펀과 데이브는 전망대로 이동해 직녀성을 바라보며 별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자주 언급하고는 하는, '우리는 모두 별의 자식'이라는 개념을 꺼내 든다. 이것 또한 일종의 자유인으로서의 이미지로 보이며, 펀의 각성에 도움을 주는 영화적 설명이라 생각한다.



펀은 데이브의 아들네 집에서 잠시 머물며 정착과 안정이라는 기생적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다시 보와의 과거를 간직한 엠파이어로 돌아가며 영화의 처음과 만난다. 이것은 아마존에서의 노동, 밥 웰스와의 대화와 더불어 수미쌍관의 특징을 갖는 <노마드랜드>의 방식이며, 노마드로서 펀의 자유를 암시하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메시지다. 밥 웰스와 펀의 고백이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되는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기억'으로 축약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위치적, 시간적 머무름이 아닌 유랑하는 인간의 간직함이 유일한 의미라는 것이다. 데이브의 실수로 아버지가 남겨준 접시는 깨졌지만, 어쩌면 펀은 밥의 말을 통해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보도, 데이브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걸.


I'll see you down the road.


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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