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영업
그 네 번째 이야기
최근 <DP>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여타 많은 '넷플릭스 제작' 영화, 드라마가 그렇듯 이 시리즈의 장점 역시 리얼리즘에 있다. 그간 한국 군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이 있었지만 <DP>만큼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리얼리즘에 입각한 '군대'라는 소재가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을까?
'군대'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가치와 감정을 지닌다. '군대'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조직된 군인의 집단"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다변화되어 왔다. 나는 한국 사회 속 군대를 정의(定義)하는 가장 큰 의미를 '정의(正義)'라고 생각한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한국 사회에서 바로 이 정의(正義)라는 것이 없었다(지금도 없다).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갖가지 커뮤니티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이 방증이다. 친일파의 자손은 외제차를 몰고, 독립 운동가의 후손은 배를 곪는다. 민주화는 이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는 허울 아래, 사회 저변에 깔린 찝찝함은 모든 시민이 공유하는 사유 재산이 됐다.
연예인 유승준과 엠씨몽의 사태를 보면서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비이성적인 분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공정에 대한 '화'라기보다 '정의'에 대한 청교도적인 잣대다. 어쩌면 공인의 일탈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단죄하면 될 문제다. 하지만 이를 넘어 이들에 대한 처벌을 '국민정서법'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다른 차원에서 다룬다는 게 내 주장이 가진 준거의 틀이다. 군대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든 국민이 수행해야 하는 공동의 의무다. 여성이 이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것은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이므로 차치하자. 이렇게 부의 크기, 학벌의 높고 낮음, 지역적 차이 등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희생하는 정의의 실현이 유일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군대다. 이년 여의 시간을 희생하는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유일무이한 '공동체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인은 이러한 정의에 부재에 분노하고, 그 존재에 목말라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지만 간절한 '정의로움', 군대가 정의에 대한 사회적 가치의 마지막 보루가 된 것에 아쉽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군대'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심정이다.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한 한반도에서 박 터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호 공유되는 일말의 감정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 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정상적으로 군 생활을 한 내 20대 초반, 그 시간이 아깝지 않다.
21살 7월, 군에 입대하게 된 당시의 나는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같은 것을 하는 것에 모종의 거부감이 있었는데, '해병대 입대'라는 것을 떠올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대다수가 입대하는 육군은 왠지 싫었고, 이왕 가야 하는 군대라면 조금 특별하거나 특이한 곳에 도전하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해병대 입대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무려 체력 시험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2006년 2월 입대를 생각했는데, 계획이 틀어져 7월 입대하는 기수(해군과 해병대는 기수제로 운영된다)에 다시 지원했다. 이번에는 해군과 해병대를 동시 지원했고, 다행히 열심히 준비를 한 끝에 두 군데 모두 합격할 수 있었다. 당시 해군 입대는 7월 14일, 해병대는 좀 더 늦은 날짜였는데, 확인해보니 해병대는 해군 소속이라 입대 날짜가 빠른 쪽에 입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왠지 강하게 주장하면 해병대 입대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 강한 의지가 없었던 나는 해군 입대로 결정을 내렸다. "망설이는 건 해병대 정신이 아니"라던 패밀리마트 사수 형의 말이 적중했다. 그럼에도 난 나름의 빡세고 즐거운 군 생활을 경험했고, 병역의 의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의 알바 역사는 군 제대 직후 이어졌다. 당시 휴가를 나와 종종 진로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아버지 사업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어 등록금을 정상적으로 지원해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눈치가 그러했다. 사실 동기들이나 친구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내고 취업 후 상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왜인지 등록금을 벌어 학교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복학보다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을 추천하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보험 영업으로 이름을 꽤 날리셨는데, 아마도 유전자의 힘을 믿으셨던지 나에게 영업직을 추천하셨다. 금융권에 인맥이 많으셨기 때문에, 나는 한 캐피털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금융사 대출 영업이라는 것이 지금도 활발히 운영되는 곳인지 모르겠으나(아마도 아닐 것이다), 짐작컨대 내가 그 직업을 경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금융의 본산이 은행에서 플랫폼으로 옮겨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2008년 8월 28일 해군을 제대했는데, 놀랍게도 8월 29일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 면접을 보고 9월 1일에 첫 출근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미리 얼굴이나 익혀 둘 겸 간 것이다. '어제 제대' 했다는 신참을 선배들은 신기하고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난 많이 어렸고, 아는 것이 없었다. 23살이 알아봐야 뭘 알았겠는가.
'대출 영업'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밑바닥이었다. 개인 전단지를 만들어 길에서 뿌리고, 다른 영업점을 돌아다니며 명함을 돌리고, 심지어는 개인 영업장에 무작정 들어가 대출 영업을 권하기도 했다. 영업이라는 것이 결국 거절의 연속이라서, 지금 생각하면 경험이라는 재산도 생겼지만 그 값으로 감내해야 하는 상처도 많았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대출 영업은 한 캐피털 사의 영업 2팀이었고, 박 팀장님을 필두로 한 팀원들은 전년 최고 매출을 기록한 1등 팀이었다.
*5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