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_신과 만화
삼일째. 돌려 놓은 빨래를 잊고 잠든 관계로 일어나자마자 지하 세탁실로 내려갔다. 5유로를 내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빌렸지만,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 내릴때마다 주인집 부부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건조기내 빨래는 먼지가 묻고 냄새가 났다. 속옷만 빼고 다시 헹굼과 탈수를 시켰다. 불어인지 네덜란드어인지 작동법이 복잡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친절하지만 영어가 서툴다. 샤워하는 동안 빨래도 완료되고, 자연 건조를 시킨 후 브뤼셀 시내로 나갔다. 막막하다. 애초에 강한 동기가 없던 여행이라 욕심나는 목적지도 있을 리 없다.
우선, 버스를 타고 그헝쁠라스 광장에 내린다. 여행객들이 많다. 야경이 좋다는 데 날이 밝아도 멋있다. 그저 외국이다. '이국적'이란 말이 왜 한국인들에게 긍정적 표현으로 인식되는 지 알 것 같다. 상점과 건물이 낡았어도 고풍스럽고 통일되어 있다. 게획된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만의 매력으로 존재한다. 한국은 도시든 건물이든 사람이든 되어야 할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서양을 동경하는 게 엘리트 지상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는 모순적 모습 때문이지 않을까. 커피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유일하게 좋은 점은 테라스에서 담배를 태우는 게 자연스럽다는 점. 쌀쌀하다.
가까운 성당으로 갔다. 니콜라스 성당. 부서지고 무너져 몇번의 복구를 거듭했다는 성당은 품은 신자들의 기도와 닮아보였다. 내 마음도 성당의 상처와 비교될 수 있을까. 종교와 신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생각됐다. 나는 신이 두렵지 않다.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인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신을 믿기는 하는 걸까? 그들이 믿는 건 악마일지 모른다. 신은 강요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은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믿는다. 신은 권력자나 독재자가 아니기에 인간의 자율의지를 재단하지 않는다. 성당이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인생은 결국 나의 나약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인 것 같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고민과 바람. 이 순간 신이 가장 친근하게 느껴진다. 도시마다 성당을 가야겠다고 다짐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멈췄던 신자수업을 이어 받아야겠다. 지옥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음까지는 모르겠고 신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성당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 만화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장 가보고 싶던 곳이다. 땡땡의 고향 벨기에의 만화 박물관. 입장료 10유로를 내고 들어간 그 곳엔 내 학창시절의 꿈이 있었다. 난 일본 만화를 멀리하고 유럽만화에 취미가 있었다. 스토리가 중요한 일본 만화에 비해 유럽 만화는 하나의 그림이 예술에 가깝다. 그림들이 합쳐져 만화가 된다. 소비되는 만화가 아닌 소장되는 작품. 나는 만화보다 그림이 좋았던 것 같다.
고 2때 즐겨듣던 브라운 아이드 소울 1집을 틀었다.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시절, 입시 그림이 아닌 내가 열망했던 무언가를 다시 느꼈다. 고등학교로 돌아가면 다시 그림을 그릴까? 하더라도 입시를 하진 않을 것 같다. 난 기본적으로 정답이 있는 도전에 약하다. 누군가에게 평가 받아야 하고, 정(正)과 오(誤)가 정해진 교육에 극도로 취약했다. 반대로, 정답이 없는 질문에 강했다. 생각을 표현하거나 토론, 논술 같은 수업은 자신이 넘쳤다. 유럽으로 유학을 왔다면 어땠을까. 인생에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난 그저 내가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렸을 것 같다. 놓지 않았어야 했다. 그림을 놓은 지난 10년이 아쉽다. 지금도 가진게 많다. 놓지 말자. 2시간을 머무른 동안 마음이 가득 찼다. 10유로를 더 내고 만화를 하나 구입했다. 읽을 수도 없는 만화를 구입하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어디를 갈까. 무작정 영화관으로 갔다. 시간이 늦었지만 일단 갔다. 영화를 바로 볼 수 있었다. UGC 영화관은 리뷰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 됐던 곳이다. 벨기에 사람들은 욕심이 많은가 보다. 기대보다 굉장히 넓고 깔끔했다. 영화관이라기 보다 극장에 가까웠다. 스크린이 좌석에서 멀고, 의자가 편안했다. 유럽은 영화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이 발달한 유럽은 영화도 그러한 흐름을 쫓아간다. 아이맥스, 4D 등 새로운 영화적 기술을 따르기 보다 이야기 중심의 영화를 선호하는 듯하다.
'퍼스트맨'은 재밌었다. 유럽의 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는 사실이 재밌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을 보고 집으로 왔다. 집주인의 걱정스런 메시지가 반갑다. 오늘은 소주를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