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5일차

10/20_파리 2일째

by Simba

5일째. 파리로 넘어온 이틀차다. 일어나 세안을 했다. 파리의 아침이라고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공용 욕실을 쓰기에 눈치를 봐야하는 점이 불편했다. 씻고 나오니 주인 부부와 다른 여행객 두명이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같이 먹자고 붙어서는 이야기를 나눴다. 거실에는 방탄소년단 노래가 틀어져 있었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여자애들은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했다. BTS 콘서트가 오늘 파리에서 있냐고 묻는 내 질문에 재밌어했다. 한국어로 BTS노래를 따라부르는 스페인 여자 아이들을 보며 신기하고도 뿌듯했다. 내 일도 아닌데 어깨가 으쓱해졌다. 멤버들 이름을 보여주며 한국어로 알려달라는 아이들에게 성을 빼고 이름만 알려줬다. 중국계 프랑스인인 주인은 조금 씁쓸해 보였다. 타지 생활에도 특유의 중화 사상은 쉬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내 표정을 숨기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대해 물어봤다. 강남이 한강의 남쪽이냐는 질문에 순간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그렇겠지만, 지금은 강남을 지명으로 사용한다고 알려줬다. '강남 스타일'이 무례한 표현이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단지 비싼 동네일 뿐. 재밌는 대화를 뒤로 하고 파리 시내로 나갔다. 한 번 타본 지하철은 벌써 익숙해졌고, 표를 구입하고 50분이 걸려 Odeon역에 내렸다.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실내와 테라스의 요금이 달랐다. 테라스에 앉아 사진을 찍고, 담배를 피웠다. 파리의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 오히려 고소했다. 설탕을 넣지 않는 게 좋았다. 날이 좋아 출발과 어울렸다. 나중에 마신 라떼는 별로였다. 파리에서는 에스프레소를 자주 마시게 될 것 같다.


'PUF'로 곧장 향했다. 수년 전 뉴스에서 본 이후로 '성지'처럼 가고 싶던 서점이었다. 텍스트 파일을 주면 즉석에서 책을 만들어 주는 이곳은 그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만큼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이 곳 주인도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뉴스를 보고 왔다는 말에 프랑스어로 되물을 뿐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프랑스인들은 영어를 안쓰는 것이라고. 막막했다. 그저 둘러본 후 서점을 빠져나왔다. 불어 패치가 없는 나는 파리에서 어울릴 수 없었다. 파리가 멀어졌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들어가기엔 너무 혼잡했다. 시간이 있으니 평일에 가기로 했다. 시넬리에 화방으로 갔다. 피카소, 고흐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들렀다는 이 곳은 100여 년동안 3대가 이어 운영하는 곳이다. 3층으로 이루어진 가게는 국내 화방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시넬리에' 자체 브랜드의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점원덕에 몇가지를 물어봤다. 묵직한 그립감의 파버 카스텔 2B연필을 필두로 수채화와 붓을 샀다. 7만원이 넘는 가격이지만 마음이 뿌듯했다.


일식당에 들렀다. 배고 고팠지만 JCB카드가 사용되는 지 궁금했다. 여기도 안된다면 신용카드 사용은 유럽에서 끝이다. 가격은 비쌌고, 양은 적고, 맛은 그저 그랬다. 점원의 친절도는 최하위였다. 유럽에서 만난 모든 사람 중 가장 불친절한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닉했다. 다행히 카드는 작동됐다. 점심은 가능한 일식을 먹어야겠다. 밥을 먹고 중고서점을 들렀다. 숙소에서 그림을 조금 그려볼까 해서다. 5, 6군데를 들렀다. 파리에는 중고서점이 많았다. 만화만 파는 가게도 있었다. 한 중고서점에서는 '막시밀리아노 프레자토'만화도 팔고 있었다. 내 우상. 이탈리아에 가면 <펠리니를 찾아서>처럼 그 자취를 쫓아볼까. 꽤 오랜시간 책을 구경하다 빠져 나오니 거리에는 사람으로 가득찼다. 버스킹 중인 아프리칸 밴드를 구경했다. 동전 몇개를 놓고 영상을 찍었다.


늦은 오후지만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의무감에 리스트를 채우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 여행을 간다고 할 때 목표를 설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정 음식을 먹고, 특정 장소를 가고, 여자와 친구를 사귀고, 사진을 많이 찍고. 여행을 하는 와중에도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여행 중에 뭔가를 해치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멀리와서 쉬고 싶었을 뿐이고, 이 낯선곳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여행을 떠나와서도 꼭 무언가에 쫓겨 살아야 하는가? 누가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심해 할 그들의 한숨을 뒤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울함이 밀려왔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 우울함이었다. '착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유독 어릴때부터 '착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쁘다'의 반대말인 착하다는 쉽게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마도 내가 세상에 눈치를 채기 시작할 무렵, 착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부정어의 부정형이지만 긍정어도 아니었다. 칭찬이 아니었다. 착하다는 나쁘다의 반대어가 아니다. 오히려 매력적이다의 반대어일 수 있다. 내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봤다. 착한 사람들은 '지인'의 범주안에 머물렀다. 한 울타리 너머 존재하는 그들은 분명 착했고,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연애나 결혼, 사업을 같이하거나 인생을 걸 만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아닌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착하다는 것은 보기엔 좋지만 가지고 싶지는 않은 무언가였다. 한마디로 착한 사람들은 잘 팔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다루기 쉽고, 무색무취해서 옆에 두고 싶지만 굳이 비용을 지불하고 소유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모른 척 했거나 부정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성격을 바꿀 순 없다. 부단히 노력했지만, 성격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필요도 없다. 억지로 사랑하는 것 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대신 영리해질 필요는 있다. 타고난 성격과 단점에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장점을 십분 발견하고 활용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항상 고민이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많지만 인기가 많은 건 아니었다. 날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 보면 선망이나 호감보다는 측은(惻隱)에 가까웠다. 가족들도, 친구들고, 형들이나 누나들도 물가에 내 놓은 강아지마냥 바라봤다. 동등한 입장이 아닌 듯한 불편함이 늘 산재했다. 받아들이자. 그게 출발이다.


그림을 하나 그렸다. 저녁으로는 피자를 먹었다. 가져온 소주는 마시지 않고 줄창 와인만 마시고 있다. 현지 음식이 생각보다 입에 잘 맞다. 파리는 5일을 더 머무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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