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느낌적인 느낌

느낌적인 느낌으로 소통하는, 감각적인 경험들이 사유를 대체하는 세상

by 초래

대통령이 바뀌었습니다. 투표가 종료되고 발표된 출구조사 결과에 이상한 안도감이 터져나오더군요. 10% 이상 차이가 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초박빙의 결과가 펼쳐졌거든요. 그 순간 궁금한 건 10%이상의 차이로 이길 것을 확신했던 젊은 당대표의 표정과 생각이었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자살행위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수위높은 막말을 이어갔던 젊은 당대표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과신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보면 쉽게 이길 수 있었던 선거를 일부러 어렵게 만든 모양새기도 했어요. 저러다 한번 엎어질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과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결과를 본 그의 표정은 살짝 당혹이 서려있는듯 했죠.


사실 당혹스러운건 저도 마찬가지였는데요. 그에게서 익숙한 저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가 명징한 근거를 가지고 내린 판단으로 선거전략을 끌어왔길 바라는 마음과 그런 근거는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부딪혔어요. 저도 촘촘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보다, 제 자신의 직관을 인사이트라는 이름으로 쌓아놓고, 그에 기반한 판단을 내리곤 하거든요. 누군가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주 당당하게 저의 직관을 펼쳐내면서요. 그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사실 제 것일 수도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깨달음의 순간이었죠.


그는 저와 다른 커뮤니티를 사용하고, 다른 알고리즘의 세계에 살면서 다른 인사이트를 얻었겠지요? 제가 저의 직관에 대부분은 의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 그도 그의 직관에 의심을 갖지 않았겠지요. 하물며 젊은 나이에 거대 정당의 대표까지 되었는데, 저처럼 자기검열과 자책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공공을 대상으로 한 무언가를 만들고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합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느낌적인 느낌과 자신의 직관으로 무언가를 결정한다면 어떤 결과가 펼쳐질 수 있을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간의 젊지 않은 공인들이 내린 결정도 그정도 수준이었을 수 있지만 연배가 비슷해서인지, 그의 사고매커니즘이 가깝게 느껴졌어요. 언젠가 팀플수업때 만났던, 리서치는 너가 하고 발표는 자신이 하겠다는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구요.


그 어느때보다 직관과 인사이트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개인의 감각과 경험을 잘 축적하면 자산이 되기도 하고, 사업이 되기도 하는 시대죠. 하지만 또 많은 것들이 순간적인 경험과 감각의 차원에서만 향유되고,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느낀 점이 모두 직관과 인사이트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많은 느낌은 파고 들지 않으면 "느낌적인 느낌, 뭔지 알지?"에 머무르게 되구요. 이 표현은 누가 만든 것인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야, 알지?" 하고 물으면 상대방의 느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매함까지 전달되는 것 같아요.


구체적인 상황과 감정을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도 가능한 이 커뮤니케이션을 보고 있자면 언어화된 짤방이나 이모티콘을 떠올리게 됩니다. '느낌적인 느낌'같은 유행어나 짤방, 이모티콘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우리'를 만들어줍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상황을, 하나의 상황으로 인지하게 하고, 과거 내가 경험한 다른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경험들과 현재를 연결짓게 만들구요. 많은 차이들은 덮어둔 채 순간적인 느낌, 감탄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우려는 몇십년에 걸쳐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효한 커뮤니케이션은 정확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구구절절 전달하는 방법 보다는 상대방이 순간적으로 감정이입하고, 감각하고,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선 후보들의 선거전략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신제품이나 새로운 서비스의 마케팅 콘텐츠에도 넘쳐나고 있고, 심사숙고가 필요한 지구의 여러가지 문제를 알리는 방법에도 적용됩니다. 이런 현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합리적인 소비자로 하여금 제발 합리적인 생각 없이 불필요한 소비를 유도하고자 몇 백년을 고심한 결과 경제경영학자들이 무엇을 이루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컬러가 감정을 조종한다는 유사과학적인 컬러마케팅부터 뇌과학적 방법으로 무의식의 뇌작용을 분석하는 뉴로마케팅까지 사람들의 삶에서 심사숙고를 없애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자본이 투입되고 있는지 생각하면 아득해집니다.


2014년에는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도 얕은 지식>이라는 책이 나왔죠.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의 저작들도 독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이 한국인의 관점으로 쓴 문턱낮은 지식개론서가 나왔다는 사실이 굉장히 반가웠어요. 인문학이나 사회학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주제가 되는 세상이 눈 앞에 다가온 듯 했습니다. 계몽적 관점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가 그동안 '지금'을 챙길 겨를 없이 '미래'를 바라보고 달리느라 너무 바빴으니까요. 문화계에서는 경제적 발전 뿐만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함께 취하는 사회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평가했죠.


어린이일때는 얕은 풀장에서 수영을 배우다 점차 깊은 물로 옮겨가잖아요. 어서 빨리 어린이용 풀장을 벗어나 어른처럼 깊은 물에 가고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면 얕은 물에 발만 담궈놓고 쉬고 싶은 마음이 있지요. 그런 부분에서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도 얕은 지식>의 전략은 적중했나봅니다. 누구나 지적인 대화는 하고 싶지만, 지식의 세계에 풍덩 뛰어들 시간과 체력을 모두가 가진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지적 활동은 어느정도 삶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보이는 세계이기도 하구요. 이 책의 성공 이후로 세상은 얕은 컨텐츠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딱 그만큼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소비자들에게 맞춘 온갖 다이제스트가 넘쳐나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지 않아도 쉽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통하면 새로운 세계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알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는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요.


지식분야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취향의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죠. 경험해야하는 콘텐츠는 넘쳐나고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기엔 세상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갑니다. '개인의 취향'만큼 중요한 가치가 없는 것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한가지의 취향에 집중하는 일은 한번에 여러가지 취향을 맛보기 할 수 있는 선택지보다 비효율적으로 느껴집니다.


원데이클래스를 몇번 다녀보면 산지별 포도품종별 와인의 특성을 개략적으로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고, 3시간 정도의 수업이면 직접 그린 유화작품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4만원을 내고 독서모임에 참여하면, 모임장이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책 내용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내것인 양 소화할 수 있죠. 사교활동으로 얻는 즐거움도 따라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맛보기 활동은 개인에게 중요한 경험자산과 매력자산이 됩니다. 취향을 추구하는 활동이 상품이 되고 균질화가 되면서 개개인이 접할 수 있는 경험의 차이도 줄어들었습니다. 진정한 '덕심'을 발견한게 아니라면 한 분야를 깊이 파기 보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지겠죠. 한 분야의 진정한 고수가 되는 일은 너무나 많은 기회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더군다나 얼마나 고수인지 아닌지 깊이와 노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다들 어느정도의 느낌적인 느낌만 가지고 있으니까요.


느낌적인 느낌으로 소통하는, 감각적인 경험들이 사유를 대체하는, 다양한 분야를 맛보기로 체험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는. 이것이 지금의 세상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 아닐까 싶어요. 이게 맞고 틀리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 괜찮고 나쁘고는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얕은 것들이 가지는 매력에 쏠리는 자본과 트래픽에 치여, 보이지 않게 침몰해가는 모든 것과 모든 다양성이 문제입니다.


몇 년 갑작스럽게 비건이나 제로웨이스트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소비자들은 기후위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되었거든요. 생산자들은 앞다투어 쉽고 편리하게 비건과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할 수 있는 방법과 키트를 제안합니다. 처음 시작이 어려울 뿐이니까, 문턱을 낮춰 비건지향과 제로웨이스트를 즐겁게 경험하고 나면 본질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실천할 거라고 기대한 부분도 있었어요.

사실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죠. 처음부터 소비자를 대하는 관점으로 직관적인 매력과 편리함을 앞세워 접근한 시도가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는 다른 매력 대체품을 상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매력을 어필해야한다는 부작용이 따라옵니다. 편리한 접근에서 본질적인 고민까지 갈길이 먼데, 고민하지 않게 만들어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세상에 그게 쉽겠냐구요. 대체육을 만들기 위해 어마무시한 양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비건 밀키트를 구매하면 수없이 많은 플라스틱이 따라옵니다. 이미 사용중이던 플라스틱 제품을 모두 제로웨이스트 제품으로 교체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시작하기도 하구요.


저는 오랫동안 제가 추구하는 신념을 널리 확산시키고 동의를 얻고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마케팅적인 접근방법으로 소비자를 대하듯 쉽고, 편리하고, 직관적인 매력을 어필하며 대중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그 판단의 이면엔 다수의 대중이 지지하지 않으면 즉, 시장의 호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사회가 거대한 시장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으니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닐겁니다.


사람들은 점점 선진적인 시민의식을 추구하고 있고, 생산자들의 세련된 감각과 생산품들의 수준도 점점 높아지니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곳곳에 매력적인 개인들이 생산해내는 진정성있는 콘텐츠, 공간, 브랜드를 보며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고, 다양성을 향한 철학과 가치가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각 지역에 매력적인 로컬크리에이터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때도 반가웠어요. 지역이 가진 엄청난 자원들이 어떻게 세상에 소개될지 어떻게 획일적인 가치기준을 무너트릴지 기대했습니다.


순진한 생각이었죠. 얕은 컨텐츠들이 원작이 받는 사랑을 나누어갖는 세계처럼, 어떤 신념들은 본질을 잊은 채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되어버리고, 어떤 진정성은 급속도로 복사되어 퍼져나가고 아무도 오리지널리티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류를 만듭니다. 그럴듯한 느낌을 만들어 판매해도 호응하는 소비자들이 있기 때문에, 외로워지는 이는 그보다 더한 노력과 비용을 들여 그럴듯한 느낌 이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알아주는 이 없는 노력을 하면, '미련하게 굴지말고 남들 처럼 해라'는 말을 듣기 일수구요. 그러니까, 소비자에게 어필하지 못하면 존재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과정에서 나의 세계가 파괴되기도 하는 외로운 창작자들만 고통스러운거에요. 여러분은 어떤 입장이신가요? 부디 고독하고 미련한 입장 바랍니다. 그 입장이 응원받는 세상을 위해 노력할거라서요.


얼마전 서울 회현동의 'piknik'이라는 전시공간에서 열린 매거진 <B>의 창간 10주년 기념 전시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매거진 <B>의 팬이라기보다는 그 반대에 더 가까운데, 왠지 안다녀오면 시류에 뒤쳐질 것 같은 두려움에 길을 나섰어요. 전시장의 초입에 매거진 <B>가 그동안 브랜드에 던져온 질문들이 적힌 벽이 세워져있었습니다. 질문을 읽으며 따라 걷는 구조였죠. 그중 "브랜드에 있어서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장 앞에 멈추어섰습니다.


그 질문 앞뒤로 이어진 내용들에 따르면 브랜드들은 자신들이 얼만큼이나 진정성있게 소비자의 삶이 나아지기를 원하는지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브랜드와 소비자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그 질문에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소비자로서 정체화할 때 얼마나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지 많은 소비자들은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인지 소비자를 진정성있게 위하는 각종 브랜드들의 자기 어필에 소비자로서 감동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보였어요. 브랜드들이 이야기하는 '당신의 삶을 우리 브랜드가 더 낫게 만들어주겠다'라는 말은 얼마나 오만한지, 저는 그곳에서도 인간 소외를 느꼈습니다.


정말로 브랜드가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생각이라면, 그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소통하고, 얄팍한 깊이로도 그럴듯해진 느낌을 주면 어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 전에 부디 한번 더 생각할 거리를 만들고, 생각과 선택을 대신 해주지 않는 브랜드가 되는거죠. 진정 주체적인 소비자를 위하고 존중한다면요.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면요. 하지만 많은 경우 브랜드들은 내일은 없는 것처럼 모두가 함께 사라지는 공멸의 길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아마 브랜드에게 이런 관점을 바라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은 브랜드와 소비자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마치 그런 것처럼 굳게 믿고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작은 이야기, 낡고 오래된 공간, 대대손손 내려온 특별한 레시피, 몇백년을 불러온 노래, 인간보다 오래 이 땅에 살아온 나무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종들, 이유도 모른채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매분 매초 사라져가는 것들을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 중에 하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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