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뉴욕, 뉴욕의 뮤지션, 그와 얽힌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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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이틴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나의 상상 속 미국 십대 소년과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른 체구에 커다란 캡모자와 검은 안경, 기다란 무지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작년의 이맘때, 나는 우연히 알게 되어 찾아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자리한 The Path Cafe의 목요일 오픈마이크 스테이지 아래서 그를 만났다. 그의 무대가 끝난 뒤 공연이 너무 좋았다고 다가선 내가 사운드 클라우드 주소를 묻자 그는 수줍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곤 내가 내민 하얀 노트에 자신의 이름과 모든 온라인 주소들을 적어주었다. 'Billy Conahan.' 내가 만난 뉴욕의 뮤지션의 이름이었다.
The Path Cafe는 찾기 힘든 곳에 있었다. 지도에 나와있던 주소에는 애타게 찾던 카페 대신에 커다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었고 그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The Path라는 글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난한 여행자이던 나는 하나에 일 달러도 하지 않는 던킨 도넛의 도넛 두개로 주린 배를 채우고 이른 봄 뉴욕 맨해튼의 크리스토퍼 스트릿을 헤매고 있었고, 마침내 두세 블럭 떨어진 낯선 모퉁이에서 초록 간판의 The Path Cafe를 찾았을 때에는 이미 무대의 음악 소리가 한창 울려 퍼진 후였다.
병맥주 하나를 주문했다. 앉을자리는 없었다. 초록 배낭에 갈색 워커를 신은 나는 카페의 유리 쇼케이스에 반쯤 기대어 에일 맥주 한 병을 마셨다. 가게는 저마다의 악기를 짊어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뉴욕의 음악가들로 가득했고 나는 그들과 한 발짝쯤 떨어져 라이트 에일 맥주를 홀짝였다.
두 팀 정도의 공연을 보았다. 시카고에서 날아온 사람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내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말끔한 소년의 모습을 한 포크싱어가 '그녀는 한낮의 꿈속에 살아가지'라는 시적인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그다음이었다. 다음 순서를 위해 정리된 텅 빈 무대 위로, 챙이 커다란 캡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뿔테 안경을 낀 커다란 티셔츠를 입은 소년이 펄쩍 뛰어올랐다. 앳된 모습이었다. 아마도 스무살 그즈음이라 짐작했다. 무대의 왼쪽에는 커다란 앰프가 있었다. 아마도 기타 앰프였다. 그 이전의 뮤지션들은 모두 다 저마다의 악기로 이어지는 검은 전선을 그 커다란 앰프에 꽂았다. 그렇게 그 커다란 앰프는 검은 전선을 타고 넘어오는 기타나 일렉 기타의 소리를 커다랗게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러나 이번의 소년에게는 기타가 없었다. 그는 앰프의 선을 집어 들더니 다른 손으로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냈다. 그리곤 그 검은 전선의 끝에 아이폰을 꽂았다. 커다란 기타 앰프에 자그만 아이폰 하나가 달랑 꽂혔다.
순간 카페 안의 관중들은 예상치 못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회자는 '발상의 전환'이라 소리쳤다. 그래, 기타의 앰프에 기타를 꽂지 않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래, 기타의 앰프에 아이폰을 꽂는들 무슨 상관이랴. 소년은 쭈그리고 앉아 아이폰을 만지작거렸고 잠시 후 커다란 훌륭한 비트가 카페 내에 울려 퍼졌다. 곧 그가 그의 목소리를 입힐 배경이었다.
그는 랩을 시작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그의 에너지는 커다랬다. 아마도 반전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그리도 그의 무대에 반하게 되었던 것은. 나는 아무래도 기타의 소리나 밴드의 음악을 선호했다. 오픈 마이크에서 힙합이라니 조금은 생소했다. 아니 뉴욕을 제외한 곳에선 생소했다. 뉴욕의 오픈 마이크에서는 많은 '비긴 어게인'의 키이라 나이틀리와 같은 뮤지션들을 볼 수 있었지만, 또한 무대에 우뚝 선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나 '힙합 뮤지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잠시 뒤 그의 힙합은 기타 소리가 울리던 공연장을 커다랗게 비틀었다. 그의 거대한 목소리는 작은 그의 체구를 힘있게 비틀었다.
실은 내가 종일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후였다. 지난 4월의 뉴욕에서, 나는 온종일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수많은 곳들을 떠돌았고 그 길었던 한나절은 커다란 뉴욕시티가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도시'라는 그 타이틀을 내게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다 흘러든 그리니치 빌리지의 라이브 카페에서 한 병의 라이트 에일 맥주가 거의다 비워져 갈 즈음 마주한 '빌리 커나한'이라는 뮤지션은, 나의 흐린 하루를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하루를 약간 비틀어 그 '황량함'을 '새로운 영감'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주었다.
악수를 마치고 나의 노트에 그의 이름을 받고 그와 나는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스치는 여행자라 말했다. 그리곤 너는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그는 씩 웃더니 뒤로 돌려쓴 커다란 모자를 앞으로 휙 돌렸다. 커다란 챙이 앞을 향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그 모자의 앞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켰다. 커다란 하얀 글자가 수 놓여 있었다. 'QUEENS.' 퀸즈는 브루클린의 지명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출신을 알렸다. 그가 뉴욕에서 왔음을 알렸다. 그는 퀸즈의 뮤지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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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산다. 다시 돌아와 서울의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산다.
그저 시간만이 흐를 뿐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오래된 여행을 들췄다. 이유 없이 요 며칠 '뉴욕'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나의 오래된 뉴욕을 들췄다. 그렇게 오래된 날의 빌리를 다시 만났다. 퀸즈에서 온 뉴욕의 뮤지션을 다시 만났다.
_아마도 돌이켜 본 그와의 만남이, 바로 4월의 봄날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Billy Conahan - Sincerely Yours
_뉴욕의 봄.
_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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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은 또 하나의 음악을 내게 남겼다. 앞으로 많은 날 뉴욕을 떠올리며 빌리의 목소리를 찾기를. 그리고 계속될 나의 여행에 또 다른 음악들이 덧입혀지기를.
덧,
'인연의 힘, 그리고 나의 뉴욕과 뮤지션의 연결고리'
_내가 뉴욕에 가게 된 것은 나의 하우스 메이트였던 기타리스트 덕분이었다. 그리곤 내가 오픈마이크 무대가 열리는 꽤나 유명한 뉴욕의 카페인 'SideWalk Cafe'에 가게 된 것은 내가 오래도록 좋아하던 한국의 인디 뮤지션 덕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사이드워크 카페에서, 저녁 아홉 시 무렵 기타를 맨 한 프랑스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그가 바로 내가 빌리를 만난 'The Path Cafe'의 목요일 오픈마이크에 대해 일러준 프렌치 뮤지션이었다. 그렇게 나는 빌리 커나한이라는 힙합 뮤지션을 만났고 그를 통해 나는 또다시 뉴욕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커다란 하나의 원형 연결고리가 아닐까.
알 수 없는 인연의 힘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