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석주 영화평론가 Jan 12. 2020

[명작으로 알아보는 영화 언어] ‘외화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거나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를 선정하여 그 영화의 명장면을 분석합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의 장면 분석을 통해 간단한 영화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면,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여장천 감독, 영화 <무중력> 스틸컷

시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여장천 감독의 <무중력>(2019)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이미지로 구현한 실로 매혹적인 영화입니다. 특히 스크린 전체를 암막으로 뒤덮고, 그 위를 하얀 점자로 수놓은 오프닝 시퀀스는 경탄을 자아내는 영화적 순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화면’(off-screen space)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파킨슨은 책 『영화를 뒤바꾼 아이디어 100』에서 “주류영화는 워낙 내러티브에 집착하기 때문에 영화의 초점이 반드시 영화 프레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외화면의 공간, 즉 카메라 뷰 밖에 있는 공간 역시 스토리를 이끌어 가고, 분위기나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데 내화면 공간 못지않게 중요할 때가 많다”라고 설명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화면이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음향이나 연기가 화면 밖에서 이뤄져 필름이 영사되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장면이나 상태”를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공간은 관객이 인물이나 장소, 소품 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내화면’과 화면에 잡히지 않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외화면’으로 구분됩니다. 뛰어난 감독들은 바로 이 외화면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뤼미에르 형제, 영화 <열차의 도착> 스틸컷

외화면의 개념은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에서부터 발견됩니다. 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사람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외화면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외화면의 미학을 염두에 둔 연출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외화면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영화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2008)는 죽은 큰아들의 기일을 맞이해 모인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삶과 죽음이 묘하게 공존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영화는 고레에다 감독의 외화면 사용법이 특히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포착되는 것은 ‘내화면의 풍경으로 흘러들어오는 외화면의 사람들’입니다. 감독은 풍경과 인물을 동시에 포착하지 않고, 풍경을 먼저 담아낸 다음에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이를 본 관객들은 자연스레 프레임을 벗어난 스크린 외부, 외화면의 세계를 상상하게 됩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 <로마> 스틸컷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는 알폰소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된, 1970년대 초 정치적 격랑을 겪었던 멕시코시티의 ‘로마’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외화면은 ‘소리’로 관객에게 끊임없이 인지됩니다.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와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가정 내 불화, 당시 멕시코의 혼돈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음매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은 외화면의 소리와 내화면의 공간을 끊임없이 충돌시키면서 외화면의 세계를 시각화합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컷

공포나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 외화면은 관객의 긴장을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과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는 모두 범인을 외화면에 배치, 갑자기 내화면으로 들이닥치게 함으로써 관객에게 서스펜스(suspense : 영화의 서사나 스타일이 관객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를 느끼게 합니다.


그렇다면 외화면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학자 질 들뢰즈에 따르면 외화면은 관객의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명확하게 ‘현전’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말하자면 감독은 외화면을 통해 관객에게 이른바 ‘가상 속의 현실’을 느끼게 합니다. 비록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와는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이죠.


사각의 틀로 프레이밍 된 스크린 내부를 넘어, 스크린 외부에도 어떤 세계가 있음을 일깨우는 영화. 그 세계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영화. 외화면이야말로 정교하게 연출된 내화면과는 결이 다른 진실의 이미지이자 또 다른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