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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달드리 감독,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

‘어떤 영화, 진짜 이야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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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영화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빌리 엘리어트>입니다.


영화는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 집권 시기의 ‘광부 대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파업의 중심지가 바로 영국 북부의 광산지대였어요.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 북부에 위치한 ‘더럼’이라는 탄광촌에서 발레를 사랑하는 ‘빌리’라는 소년이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아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대학 때 쓴 <빌리 엘리어트> 리뷰예요.

지금 보니 새롭네요.

^^;




드라마 작가 제프 멜보인은 예술은 마음과 눈, 손끝에서 시작된다고 했고, 시인 위트먼은 예술 중의 예술은 바로 소박함이라고 했다. 예술에 대한 두 문필가의 격언으로 <빌리 엘리어트>를 정의해보면, 이 영화는 빌리의 마음과 눈, 손끝에서 시작하는 한 편의 성장담이며 이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좋아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실천할 줄 아는 빌리의 소박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저 빌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영화다. 거기다 예술을 보듬을 줄 아는 소년의 이야기라니!


영화의 시작, 티렉스(T. Rex)의 ‘Cosmic dancer’를 배경음악으로 침대 위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빌리의 움직임은 영화 전반의 운동성과 맞물려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곳곳에 구축하고 있다(가장 대표적인 예가 빌리를 발레 학교에 배웅하고 다시 광산 아래로 내려가는 빌리의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포착한 장면이다).


사실 어려운 현실을 딛고 성공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의 성장담은 은막 위에서 숱하게 반복돼 왔다. 이미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가져가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절망과 희망이 적절한 무게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그려내는 현실은 남루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그 속에서 피어난 꿈은 마냥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영화는 빌리의 손에 희망이라는 것을 쉽게 쥐여 주지 않는다. 그것은 절망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빌리의 캐릭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11살 소년 빌리는 탄광촌에서 일하는 무뚝뚝한 아빠와 형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권투나 레슬링엔 관심이 없지만 피아노와 발레에는 남다른 열정을 보이는 빌리. 소년은 열악한 환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 이 건강한 캐릭터가 특히나 생동하는 이유는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을 상식적으로 응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레는 남자가 하는 게 아니야”라고 일갈하는 아빠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고(물론 아빠는 후에 빌리의 꿈을 응원한다), 자신에게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는 친구를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한다.


<빌리 엘리어트>는 <400번의 구타>처럼 청춘의 방황과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진 않는다. 하지만 빌리의 모습에서 앙트완의 잔영이 짙게 일렁이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가 줄곧 유지하고 있는 적절한 균형 감각에 있을 것이다. 인물의 내면과 사회의 부조리를 스케치하면서도 대중영화의 미덕을 저버리지 않는 것. 쉽지만 진중한 것!


<빌리 엘리어트>가 눈부신 이유 중 또 하나는 종국에 “그래도 나는 희망 없이 살아남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성장영화의 전형과도 같은 교훈을 언어(대사)가 아닌 빌리의 몸짓(이미지)으로 빚어낸다는 데 있다. 거기에 더해 빌리에 제대로 이입한 제이미 벨의 순도 높은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예측 가능한 서사를 끝까지 응원하게 만드는 동인을 부여한다.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그리고... 사라져 버려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날으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 네, 전기처럼요.

어떤 일에 열정을 가져본 사람은 안다. 하고 싶어서 했지만 마냥 즐겁지가 않다. 심지어는 나를 가장 큰 고통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 절대 행복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도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괴로움이며 즐거움이다. 수없는 좌절과 실수 끝에 피루엣(발레 회전 동작)을 처음으로 성공한 후 빌리가 지어 보였던 웃음은 단순히 성취의 기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웃음의 이면에는 아마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었던 자신의 가능성을 온몸으로 확인했다는 안도가 춤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발레리노가 된 빌리는 한 마리의 새처럼 도약한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빌리의 하강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디졸브되면서 다시 소년 빌리가 침대 위에서 뛰노는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렇게 관객들의 가슴에 성취의 기쁨이 아닌, 가능성의 기쁨을 아로새기며 끝난다. 할 수 있다가 아닌,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 희망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오롯이 관객의 몫에 달려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관한 제 해설이 궁금하시면,


7월 5일(일) 오후 6시 20분, TBN(강원) <달리는 라디오> - ‘어떤 영화, 진짜 이야기’(FM105.9)를 들어주세요. 구글 플레이나 앱스토어에서 ‘TBN 교통방송’ 앱을 다운로드하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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