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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Sep 09. 2022

대중문화가 장애인을 재현하는 방식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통권 567호에 실린 글입니다. 김현구 편집자님께서 '대중문화  장애, 시선의 변화' 주제로 원고 청탁을 해주셨어요. 그간 제가  장애 관련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단일 영화로 썼던 원고의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글이 있다. 바로 자크 리베트의 비평문 「천함에 대하여」다. 자크 리베트는  글에서 영화 <카포> 예로 들며 자살하는 여성을 트래블링 (Travelling shot)으로 포착하는 카메라의 현란한 움직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현란하게 찍을 필요가 없는 장면을 현란하게 찍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후)이라는 책에서 카메라를 ‘ 비유한  있다.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캐릭터의 인격을 짓밟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총과 다를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의 논평은 재현의 윤리와 관련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대중문화 속 장애인들의 모습


미디어는 언제나 고통에 처한 캐릭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나를 대신해 고통당하는 존재들을 보기(혹은 구경하기) 위해 영화관에 가거나 TV를 본다. 사람들의 관음증적 유희에는 당연하게도 비윤리적인 측면이 있고, 창작자는 어느 정도 그것을 활용한다. 가령 나는 영화 <기생충>이 수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불편한 지점도 있었는데, 이 영화가 던지는 서늘한 사회적 메시지와는 별개로 빈자들의 삶이 얼마간 대상화됐기 때문이다. 계급의 문제를 설파하기 위해 빈자들을 꼭 벌레나 괴물처럼 묘사할 필요는 없다.


또 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흥미롭게 봤지만, 이 드라마가 이지안(이지은 분)을 다루는 방식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극중에서 이지안은 세상의 모든 고난을 등에 업은 여성으로 나온다.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유독 그만이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첩보 활극을 선보인다. 그는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캐릭터를 막다른 골목에 가둔 뒤 시혜적으로 구원하는 서사는 조악하다. 캐릭터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럴 수밖에 없으니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몰아 부치는 작법은 난감하다.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던 영화 <귀향>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하는 소녀들의 참담한 상황을 부감 숏(High angle shot)으로 포착한다. 집단 강간 장면을 중계하듯이 위에서 내려다본다. 특히 강간당하는 소녀의 움직임과 합일을 이루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이다. 마치 카메라가 소녀를 강간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전시하는 <귀향>의 연출은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효과를 거뒀을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톺아볼 지점이 있다. 거칠게 말하면, 나는 이 드라마의 연출이 곤충의 사지를 절단한 후 그 움직임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는 철없는 아이들의 잔혹한 장난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삶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극한의 상황에 가두고, 살생하는 이미지를 통해서 이 드라마가 쟁취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살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과 사람을 믿은 죄밖에 없는 이주노동자는 결국 어떻게 되었나? 이 드라마의 미진한 인권 감수성과 기괴한 생존주의를 장르적 허용이나 쾌감으로 눙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재현’에서 ‘장애인 재현’으로 논의를 구체화해보자. 영화 비평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을 알 것이다. 2002년에 개봉한 이창동의 영화 <오아시스>는 당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영화로 이창동과 문소리는 제5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각각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나온 난봉꾼 종두(설경구 분)와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문소리 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성일은 당시 이 영화에 거의 유일하게 반대 목소리를 냈다.


정성일은 이 영화가 “기만적인 환영술”을 부린다고 비판했다. 장애인 여성의 삶을 보듬는 척하면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에는 종두가 집에 혼자 있는 공주를 찾아가 강간하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 전후에 배치되는 숏들이 공주의 성적 욕망을 부추기고, 강간을 시도한 종두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식으로 교묘히 편집됐다는 게 정성일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이 영화는 잘 짜여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라고 덧붙였다.


정성일의 논법에 따르면 <오아시스>는 모든 상황과 조건을 초월한 어느 남녀의 지고지순하면서도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던 남성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한 처량한 장애인 여성의 이야기로 수렴한다. 장애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권리를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권리를 말하기 위해서 질주하다가 엉뚱하게 가부장제의 골짜기를 더욱 깊게 파버리는 영화다. 정성일의 비판론은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재현할 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텍스트다.


소비하지 않고, 동행하는 법


<오아시스> 개봉 이후 3년 뒤인 2005년에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말아톤>은 달리기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발달장애인 초원(조승우 분)과 그를 마라토너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어머니 경숙(김미숙 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어 1년 뒤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 <맨발의 기봉이>가 개봉했다. 두 영화는 각각 장애인의 인간 승리와 낡은 감상주의에 지나치게 천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대개의 장애인 소재 영화가 정치적인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두 작품은 대중 극영화로서 나름대로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2013년에 개봉한 <7번방의 선물>이다. 이 영화는 현재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8위를 기록 중이며 10위권 내의 영화 중 유일하게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영화는 여섯 살 정도의 지능을 가진 발달장애인 용구(류승룡 분)와 그의 딸 예승(갈소원 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극중에서 용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뒤 사형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용구의 딱한 사정에 같은 방 수감자들은 그의 딸을 몰래 교도소로 데려온다. 이후 영화는 부녀의 교도소 생활을 웃음과 감동을 섞어서 그려내는 데 골몰한다.


요컨대 <7번방의 선물>은 다소 무리한 상황 설정으로 장애인을 사지로 몰아세우는 영화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를 “캐릭터 학대”라는 표현으로 비판했다. 캐릭터의 형상화 방식이 너무 폭압적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로 장애인은 언제나 구원받아야 하는 안타까운 존재라는 이미지가 더욱 고착화됐다. 여기에 한국영화의 고질병인 작위적 신파까지 더해지면서 <7번방의 선물>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작품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결과를 낳았다. <7번방의 선물>이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흥행했다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주지하다시피 <오아시스>와 <7번방의 선물> 그리고 <말아톤>과 <맨발의 기봉이>는 각각 장애인을 ‘불쌍한 사람’으로 대상화하거나 한 가지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존재로 묘사했다. 비장애인을 불쌍하거나 천재적인 인물로 이분화해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장애인 역시 이 두 가지의 존재로만 재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에서 장애인의 이미지가 자꾸 이런 식으로만 소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극적인 재미를 위함이고, 두 번째는 일상의 영역에 장애인이 있다는 인식이나 감각 자체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전과는 조금 결이 다른 장애인 소재 콘텐츠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우영우(박은빈 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장애인을 애처로운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 우영우는 무직에 기초 생활비를 수급 받는 가련한 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직업이 변호사고, 로펌에서 적지 않은 돈을 벌며, 멋진 남성과 연애도 한다. 주변인들 또한 우영우를 이상하거나 불편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한 인간으로 존중한다. 거리에 나와 힘겹게 투쟁하는 뉴스 속 장애인의 이미지와 우영우는 거리가 멀다.


물론 한계도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역시 <말아톤>을 비롯해 박정민의 피아노 연기로 화제가 됐던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처럼 ‘발달장애인=서번트 증후군’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 기대는 측면이 있다. 발달장애인이면 반드시 한 가지 분야에 비범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부추긴다. 이 환상은 미디어 바깥에 있는 실제 장애인들의 삶의 지평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발달장애인=천재’라는 도식의 고정된 견해와 사고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실제 장애인의 삶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장애인을 다룬 한국 극영화 가운데 <나의 특별한 형제>와 <나는 보리>를 인상적으로 봤다. 두 영화는 장애인의 인간 승리에는 큰 관심이 없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삶의 숱한 허방과 어려움 속에 놓여있지만, 그것을 능동적으로 메우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삶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분투한다. 영화는 그들을 해결 불가능한 극악스러운 상황에 빠뜨리거나 비장애인 영웅을 등장시켜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카메라도 관음과 구경의 시선을 거두고, 그들의 일상을 보듬으며 그저 동행할 뿐이다.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영화 <코다>도 위와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코다>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은 골방에 갇혀 신음하거나 골골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적당히 속물적인 인간들이다.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했을 땐, 당당하게 의사표현을 하는 건강한 시민이기도 하다. 이 당연한 모습이 그간의 장애인 영화에 없었으니 <코다>가 큰 상을 받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장애인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


나는 건조한 영화를 좋아한다. 우리의 실제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일상은 윤기가 없는 마른 날들의 연속이다. 그 마르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약간의 환상과 빛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언급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혁명가 체 게바라가 말했다고 알려진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와 같은 격언은 뜬구름이 아니라 철저히 일상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장애인 재현도 이상이 아닌 일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작년 8월에 에세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판미동)의 저자 신순규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알려진 것처럼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공인재무분석사(CFA)다. 이 외에도 그의 이름에는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성취를 거뒀다는 수사가 따라붙는다. 영화감독 이길보라의 말처럼 ‘장애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은 장애인을 어딘가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평소 미디어의 장애인 재현에 관심이 많던 나는 저자에게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인들이 일상적인 공간에 머무르며 스쳐 지나가는 역할로 많이 등장해야 한다. 이건 내가 미디어 업계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다. 장애인을 인간 승리의 주제로 거창하게 소비하지말고,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삶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주인공이 무심코 방문한 빵집 가게의 사장이 장애인일 수도 있고, 우연히 들른 은행의 직원이 장애인일 수도 있다. 그런 이미지가 자주 노출되면, 대중들이 장애인을 더욱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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