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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Oct 18. 2022

법정과 법정영화 사이에서

[기자수첩] 법정과 법정영화 사이에서


법정영화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법정영화의 재미는 법정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법리적 공방에 있기 때문이다. 로브 라이너 감독의 ‘어 퓨 굿 맨’에서 캐피 중위(톰 크루즈)가 제섭 대령(잭 니콜슨)을 신문하는 장면은 법정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배심원들의 차분하면서도 격렬한 토론이 인상적인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명의 성난 사람들’도 흥미로운 법정영화다.


실제 법정 분위기도 대체로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가끔 검사와 변호사의 말에 미묘한 감정이 실리는 때도 있지만, 그들의 발화는 법정영화 속 배우처럼 극적이지 않다. 피고인에게 무거운 형량을 선고하는 판사의 주문도 그렇다. 법정이 뜨거워지는 순간도 있다. 방청석에 있는 피해자 가족이 극악무도한 가해자를 마주할 때다.


지난달 23일 전 연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병찬이 2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 판사의 주문에 피해자의 가족은 사형을 요구하며 오열했다. 특히 피해자의 어머니는 재판 직후 기자들 앞에서 “아름답고 화목했던 우리 가족에게 웃음이 사라졌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피가 끓고, 가슴이 아리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법원을 오래 출입한 ‘선수’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법원 출입 기간이 이제 겨우 한 달인 기자에게 그러한 풍경은 생경했다. 흉악범으로부터 자식을 잃은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고, 추가 취재를 위해서 울음이 멈추지도 않은 그들에게 다가가 휴대전화 번호를 요청해야 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날 김병찬 기사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현듯 법정영화를 보며 한가한 품평을 읊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극 중에서 가해자가 법정에 들어서자 욕설을 하며 울부짖었던 피해자의 모습을 보고 “또 신파네”라고 나지막이 말했던 순간 말이다. 법정을 영화로만 목도했던 기자의 입은 그렇게 무정하고 얄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영화가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없다. ‘몸’이 아닌 ‘말’의 액션을 선보이는 법정영화의 장르적 쾌감은 지성(知性)과 합리(合理)를 근간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영화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뜨거우면 안 된다. 뜨거우면 논리가 타버린다. 논리가 없는 법리적 공방은 유치하다.


다만 실제 법정은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장소라는 걸 말하고 싶다. 거기에는 배우가 아닌 ‘진짜 사람’이 있다. 딸의 원혼이라도 달래주고 싶다던 피해자 어머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 말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법정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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