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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Nov 20. 2022

K-콘텐츠는 어쩌다가 지구촌의 즐거움이 됐나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통권 572호에 실린 글입니다. K-콘텐츠에 관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짱구는 못말려>와 <슈퍼 그랑죠> <포켓몬스터> 등의 만화를 보고 자랐다. 필자는 이 만화들이 당연히 한국만화인 줄 알았다. 한국 방송국에서 방영했고, 만화 속 주인공들이 한국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짱구가 일본어로 말하는 영상을 보게 됐을 때, 조금 허탈했다. 열광했던 만화가 ‘남의 것’이라는 데에서 오는 배신감을 어린 나이에 느꼈던 것 같다. 반대로 <아기공룡 둘리>가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안도감 비슷한 걸 느꼈다.


이런 예는 무궁무진하다. 스튜디오 지브리와 디즈니로 대변되는, 필자가 사랑했던 애니메이션들은 전부 외국에서 건너왔다. 물론 <검정 고무신>과 <머털도사> <달려라 하니>도 좋은 애니메이션들이다.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나 <토이 스토리> 등에 더 관심과 애정이 갔던 게 사실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니모를 찾아서>를 보고 나서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시작한 외국문화에 대한 동경은 점차 영화와 음악, 문학으로까지 이어졌다. 왕가위의 스타일리시한 장면에 매료됐고,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에 빠져 과한 유난을 떨었다. 친구들이 소녀시대나 SG워너비의 노래를 들을 때, 비틀즈와 존 덴버 그리고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를 MP3 플레이어에 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민음사)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민음사)을 읽으면서 방황하는 젊은이의 마음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2000년대 초반 윤석호 감독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흥행했을 때, 조금 의아했다.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일본을 여행했을 때, 간사이국제공항에서 오사카의 도톤보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톤보리의 가장 높은 빌딩에 최지우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는 게 아닌가. 한국에도 최지우의 사진이 그렇게 크게 걸려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당시 일본에는 ‘지우히메’와 ‘욘사마’가 흐르고 있었다. 한국의 문화가 퍼지고 또 번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한류’라고 불렀다.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한류는 우리나라의 문화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을 말한다. 1990년대 말부터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시작한 한류는 이제 세계적 현상이 됐다. 한국의 문화가 전 세계로 흐르고, 퍼지고,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금 거창한 질문을 해보자. 세계는 왜 K-콘텐츠에 열광하는 것일까?


K-콘텐츠는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지난 5월 제75회 칸영화제 취재를 다녀왔다. 영화제 기간 대부분을 프레스룸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다양한 국적의 기자들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말하면, 그들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등을 언급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대개 “나 그거 봤어” 혹은 “나 그거 알아”와 같은 반응이었다. 이어 그들은 한국의 영상 콘텐츠가 강렬하고 인상적이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덧붙였다.


한 이탈리아 기자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계급 문제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보여줬다”면서 K-콘텐츠의 강점으로 ‘재미’와 ‘대중성’을 꼽았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 구도 속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지옥도를 한국의 창작자들이 흥미롭게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 이탈리아 기자는 “그렇지만 난 김기덕의 팬”이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했고, 자리를 뜨면서는 박찬욱의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올해 한국영화가 칸영화제를 주도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박찬욱이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송강호가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정재가 연출한 <헌트>도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되면서 큰 관심을 받았다. 정주리의 <다음 소희>는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됐다. 캄보디아계 프랑스인인 데이비 추가 연출한 <리턴 투 서울>은 한국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무척 이채로웠다.


그러니까 한국 감독이 연출한 한국영화만 주목받은 게 아니다. 한국 국적이 아닌 감독이 한국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거나(<리턴 투 서울>) 한국 배우들과 함께 한국영화를 만들었다(<브로커>). 한국영화의 지형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얘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칸영화제 당시 “코로나19가 극심했을 때, 집에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봤다. 그때 아이유라는 배우를 알게 됐는데, 그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고 밝혔다.


아이유 얘기가 나왔으니 K-팝에 관해서 말해보자. 2012년에 싸이가 미국 방송국 NBC ‘Today show’에 출연해 ‘강남 스타일’을 부르는 모습을 보며, 필자는 오사카의 도톤보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창밖의 커다란 최지우 사진을 보고 전율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BTS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더 이상 충격적인 소식은 아니다. 이 외에도 보아, GD, 블랙핑크 등 한국이 아닌 곳에서 박수를 받는 아티스트들이 많다.


K-퍼블리싱의 현재


한국문학도 빼놓을 수 없다. 2022년 3월 정보라의 『저주토끼』(아작)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창비)이 각각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와 1차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인터내셔널 부문은 비영어권 작가들의 영어 번역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선 한강이 2016년 『채식주의자』(창비)로 해당 부문에서 수상한 적이 있다. 이후로 2018년과 2019년에도 각각 한강의 『흰』(문학동네), 황석영의 『해질 무렵』(문학동네)이 해당 부문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지난 2월에 체코에서는 김금숙의 『풀』이 뮤리엘 만화상 최우수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뮤리엘 만화상은 체코만화협회에서 주관하는 상이다. 만화, 작화, 시나리오, 번역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한 우수 작품을 선정해 시상한다. 한국 그래픽 노블이 이 상을 받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번 성과는 SF와 그래픽 노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문학이 주목받고 있는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여름이 온다』(비룡소)로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이수지의 선전도 뜻깊다. 지난 3월 이 같은 수상에 대해 문재인 전 대통령은 “‘출판 한류’의 위상을 높인 이 작가가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축하했다. 이어 “한국의 그림책은 아름다운 그림과 독창적인 내용으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그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라며 “형식 면에서도 늘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세계 그림책의 새 역사를 만들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지난 4월 일본에서는 손원평의 『서른의 반격』(은행나무)이 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일본 서점대상은 2004년 서점 직원들에 의해 설립된 상이다. 온라인서점을 포함한 일본 전국의 주요 서점 직원들이 직접 투표해 선정한다. 그 가운데 번역소설 부문은 2012년에 신설돼 아시아 소설로는 최초로 『아몬드』(창비)가 2020년에 수상한 바 있다. 손원평은 『아몬드』에 이어 『서른의 반격』으로 두 번째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백희나는 지난 6월 『달 샤베트』(책읽는곰)로 미국 보스턴 글로브 혼북 어워드에서 그림책 부문 명예상을 받았다. 2년 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은 데 이어 다시 한번 국제무대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안은 것이다. 1967년 제정된 보스턴 글로브 혼북 어워드는 아동청소년문학계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다. 한국 작가로는 앞서 안데르센상을 받은 이수지 작가가 2013년 미국 작가의 글에 그림을 그린 『이 작은 책을 펼쳐 봐』(비룡소)로 명예상을 받은 바 있다.


이영주는 지난 10월 시집 『차가운 사탕들』(문학과지성사)로 미국 문학번역가협회(ALTA)가 수여하는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상했다. ALTA는 매년 영어로 출간된 아시아 시 작품 중 뛰어난 작품의 번역가를 선정해 이듬해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여하고 있다. 상은 미국 시인이자 불교문학 번역가로 활동한 루시엔 스트릭의 이름을 따 2009년 제정됐다. 한국 작품이 수상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돌기민의 『보행 연습』(은행나무)은 국내 출간 전 영미권에 판권이 수출되면서 큰 이슈가 됐다. 지구에 불시착한 식인 외계인의 시선을 통해 젠더, 장애, 육식 등의 주제를 전위적으로 다룬 소설로 한국 퀴어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이 책은 국내 출판사인 은행나무에서 출간되기 전 하퍼콜린스의 임프린트인 하퍼비아 출판사에 판권이 팔렸다. 『보행 연습』은 2023년 상반기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돈’되는 K-콘텐츠


이러한 K-콘텐츠의 인기는 경제적 효과로 이어졌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지난 5월 발표한 「K-콘텐츠 수출의 경제효과」 보고서를 살펴보면 K-콘텐츠 수출 1억 달러 당 소비재 수출을 포함한 생산 유발 효과는 대략 5억 1000만 달러에 이른다. K-콘텐츠 수출액이 1억 달러 늘어나면 소비재 생산이나 K-콘텐츠 생산 등을 포함해 총 2982명의 취업유발 효과가 있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해당 보고서를 발표한 김윤지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다양한 플랫폼 서비스 발달로 콘텐츠 산업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K-팝, Kꠓ드라마 등 K-콘텐츠의 세계적 위상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며 “이번 분석에서 확인된 것처럼 문화와 취향이 중요한 소비재의 수출시장 개척에 Kꠓ콘텐츠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K-콘텐츠의 인기가 한국 제품에 대한 호감도 상승을 견인, 한국 소비재 수출 증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K-콘텐츠의 미래


상이나 돈으로 문화의 가치를 재단하는 일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영화와 음악, 드라마와 출판 등 각종 콘텐츠 분야에서 한국문화가 거둔 국제적인 성취는 분명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에 국제적 수상 궤적과 경제 효과 등을 통해 현재 한국문화가 놓인 위치를 가늠하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K-콘텐츠에 열광하는 외국인들이 신기하지 않다. 봉준호의 <기생충>을 보며 만국 공통의 문제인 경제적 계급 격차를 고민하고,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며, BTS의 음악을 들으면서 기쁨과 치유를 동시에 얻었다는 그들의 말이 곧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만든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구호는 이제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됐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한 봉준호의 말에서 K-콘텐츠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한국문학의 우수성을 묻는 질문에 “한국 독자들은 전통이나 고전에 집착하지 않고 정보기술과 과학적 상상력에 매우 열려 있다”며 “소재나 장르에 상관없이 재미있는 이야기에 개방적이기 때문에 작가로서도 그런 추세를 따라가게 되므로 신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정보라의 논평 역시 유익하다.


K-콘텐츠의 미래는 더 이상 ‘K’를 의식하지 않을 때 더욱 발전하고 확장할 것이다. 문화에는 국경이 없다. 필자는 일본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슈퍼 그랑죠>를 좋아한 게 아니다. 외국인들이 <강남 스타일>이나 <오징어 게임>에 열광한 이유 역시 K-콘텐츠여서가 아니다. 그냥 작품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다. 초연결 사회에 살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재미를 추구하는 젠틀하면서도 심플한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은 K-콘텐츠가 아니라 ‘좋은 콘텐츠’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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