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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Oct 08. 2023

해외에서 비극을 다루는 방식

<타이타닉>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리고 비극의 재현

1912년 4월 15일 새벽,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에서 침몰했다. 빙산과의 충돌이 원인이었다. 신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거신족 티탄에서 이름을 따온 배였지만, 속절없이 수장됐다. 이 사고로 대략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야말로 대형 참사였다. 사고 이후 국제사회는 해양 안전에 골몰했고, 참사 후 2년 뒤 런던에서 해상인명안전협약(SOLAS)이 채택됐다.


이동 수단은 늘 속도와 경쟁했다. 도착지에 빨리 당도해야 유명세를 얻기 때문이다. 유명세는 돈으로 이어진다. 타이타닉호도 대서양을 최단 시간에 항해해야 한다는 목표에 혈안이 돼 있었다. 항해사는 주변을 지나던 다른 선박들의 빙산 충돌 경고를 무시하고 속도를 더 내다가 비극을 맞았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 비극적 사고에 사랑 이야기를 접목했다. 바로 1998년에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이다.



<타이타닉>은 초중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과 로즈(케이트 윈슬렛 분)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면서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따른다. 우연히 만난 남녀는 첫눈에 반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계급 격차다. 무너진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로즈에게 가난하지만 화가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잭은 사랑의 대상이자 구원의 주체였다.


중반 이후 배가 침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카메론은 관객들에게 재난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배가 빙산에 부딪힌 뒤 수직으로 꺾여 침몰하는 장면은 매우 스펙터클하다. 큰 건물이 붕괴하고, 다리가 무너지며, 비행기가 추락하는 등의 이미지들은 재난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파괴와 몰락의 이미지에서 관객들은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동시에 관객들은 잭과 로즈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사랑을 완성하길 희망한다. 파괴와 몰락이 아닌 재생과 충만의 이미지다. 부서지는 배의 스펙터클에 열광하면서도 두 남녀의 아름다운 합일을 염원하기. 두 가지 감정의 충돌은 감독의 역량에 따라 모순적 불협화음이 되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이 맞물린 감미로운 이중주가 되기도 한다. 경쾌한 장조의 선율에 슬픈 가사를 입힐 때, 더 큰 감정적 동요가 오는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


카메론은 왜 86년 전에 발생한 거대한 침몰을 1990년대에 소환한 것일까? 1991년 12월 미국과 대척점에 있었던 소련이 해체됐다. 1995년 1월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비정한 무한경쟁 사회를 만들었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은 모든 수단을 정당화했다. 돈을 위해 누군가의 사다리를 걷어찼고, 환경을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은 조금씩 훼손됐다.


<타이타닉>은 오만에 빠질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성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대자본의 횡포에 무너진 인간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역시 침몰할 수 있다는 경고 말이다.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한 뒤, 제일 먼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자들은 배 가장 아래에 있는 빈자들이었다. 일등석 부자들이 구명정에 다 탈 때까지 그들은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죽었다. 계급 차이로 인한 운명의 향방은 재난영화의 관습 중 하나다.



타이타닉호가 수직으로 꺾여 침몰할 때, 승객들은 살기 위해 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이때 카메라는 바다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부감 숏(High Angle Shot)으로 포착한다. 아니, 찍어 누른다. 승객들의 동선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혹은 계급 상승의 열망)이 투영된 움직임이라면, 카메라의 동선은 이들의 몸부림과 열망을 저지하는 쪽이다. 잭과 로즈는이 같은 비극의 스펙터클에 올라탄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중반 이후 로즈는 잭에게 “배가 항구에 닿으면, 당신과 도망할 거예요”라고 말하며 키스한다. 이어 카메라는 두 사람의 키스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낄낄거리는 경비 직원들을 비춘다. 다음 장면에서 관객들은 배를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는 빙산을 경비 직원들의 시점 숏(POV, point of view)으로 마주한다. 충돌 직전의 이 세 숏을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타이타닉호는 본분(사람)을 망각하고 다른 것(돈)에 눈을 돌렸다가 침몰했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는 소련의 해체로 냉전이 종식됐고, 미국 주도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몰락이었지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저 빨리 도착하기 위해 주변의 경고를 무시한 오만함. 호화스러운 미국행 배의 침몰. 속도와의 경쟁. 잭과 로즈의 계급 격차. 빈민들의 죽음. <타이타닉>을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로 읽을 수 있는 단서들이다.


전쟁에 대한 경고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전쟁에 대한 경고’로 나아갔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에는 어느 정도 평화가 정착됐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1990년 걸프 전쟁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폭격했다. 이른바 ‘사막의 여우(desert fox)’ 작전이었다.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자신의 탄핵을 덮기 위해 이라크를 폭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한 해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세상에 내놓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소재로 한 이 영화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미 국방부는 형 셋을 잃은 일병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임무를 하부에 지시한다. 그 일병은 제임스 라이언(맷 데이먼 분)이다. 다소 황당한 임무를 부여받은 밀러 대위(톰 행크스 분)는 부대원 일곱 명과 함께 험난한 여정을 떠난다.



라이언을 만나기 직전에 밀러는 두 명의 부하를 잃는다. 위태로운 폐허 속에서 한 독일 가족이 밀러 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의 어린 딸만이라도 데려가 달라는 아버지의 말에 카파조 일병은 딸을 품에 안는다. 밀러는 작전 중에는 보호할 수 없다며 딸을 다시 가족에게 보내라고 명령한다. 그 순간 카파조는 독일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미군의 죽음으로 한 독일 가정이 수호되는 비극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이후 밀러 팀은 독일 기관총 부대가 매복한 사실을 알게 된다. 팀원들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우리들의 임무는 독일 기관총 부대의 제거가 아니라 라이언을 찾는 데 있다는 취지다. 하지만 밀러는 “우리의 목표는 승전”이라고 말한다. 결국 팀은 기관총 부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만, 교전 중에 웨이드 병장이 전사한다. 팀원들은 웨이드를 쐈던 독일군을 생포하지만, 밀러는 그를 풀어준다.


영화 후반부에 밀러 팀은 라이언을 찾는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을 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이들은 힘을 합쳐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항전하고, 밀러를 포함한 대부분의 팀원들이 폭사한다. 홀로 목숨을 부지한 라이언은 밀러의 유언대로 미국으로 돌아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산다. 그런 점에서 라이언은 일종의 거대한 메타포다. 밀러 팀이 구한 건 라이언이 아니라 미국 시민이었고, 미국 그 자체였다.


비극과 살육의 스펙터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독일의 시점으로 보면 어떨까? 펄럭거리는 성조기로 시작해서 끝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물론 반전反戰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전쟁영화는 그 형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나치게 미군의 궤적을 정의롭게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맥락은 가려져 있다. 나치 독일은 악의 화신이며 미군은 거기에 대항하는 정의의 수호신일 뿐이다.


조창현은 논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타난 대조적 이미지」에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독일군은 나쁘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며 “싸우는 당사자들의 분명한 주장과 우리의 객관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구체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서로 싸우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독일군이 미군의 영웅성을 부각하는 도구로 전락됐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독일군은 등장하지만,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유일하게 단독으로 나오는, 웨이드를 저격한 독일군도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스필버그는 단 한 명의 독일군조차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논문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마을을 전방위적으로 폭격한 뒤에 독일군의 시체를 찾았다. 조준 폭격이 아닌 것이다. 노르망디 주민들은 이러한 미군의 무자비함을 비난했다. 이 같은 미군의 행위를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극 중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총소리를 닮았다. 비가 나뭇잎에 떨어지는 것처럼 미군은 당연하게 독일군을 사격한다. 그건 독일군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의 메시지를 얻는가? 아니면 군인들이 폭사하며 신체가 훼손되는 이미지를 통해 전쟁영화의 쾌감을 얻는가? 다소 잔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영화 초반부의 전쟁 장면이 당위성을 얻으려면, 독일군의 맥락을 적절히 다뤄주면서 미군의 이야기를 전개해야 했을 것이다.


반전의 메시지와 무관하게 이 영화가 얼마간 ‘전쟁 포르노’로 비난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문학동네)가 기념비적 전쟁문학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간 전쟁 담론에서 들을 수 없었던 여성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독일군은 300만 명이 넘지만, 이 영화에서 독일군의 목소리는 철저히 가려져 있다.


비극의 재현


예술은 비극적 사실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보자. 테러의 위험성을 교육할 때 아마 가장 손쉬운 방법은 2001년 9월 11일 테러범에 의해 탈취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시속 950km/h의 속도로 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한 직후의 모습이 담긴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상 속에는 아무런 맥락이 없다. 거기에는 알카에다의 극단주의와 오사마 빈 라덴과 미국의 대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이 소거되어 있다.


예술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사실을 극화한 것이다. 예술의 수용자들은 캐릭터와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동시에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예술과 거리를 둔 채, 지금 이 자리 혹은 이 시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과 감각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고통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인간의 고통이다. 객체로서의 예술이 항상 주체로서의 관객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바로 회화에서 말하는 ‘대상성’이다.


<타이타닉>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각각 재난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영화화했다. 능동적인 관객은 극장 안에서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전쟁의 참상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극장을 나서면서는 왜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수밖에 없었고, 왜 미 국방부가 한 명의 군인을 구하려고 여덟 명의 군인을 사지로 내몰았는지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의 과정에서 관객들은 예술과 현실의 관계성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예술은 비극적 순간의 묘파를 통해 영원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고통을 오롯하게 직시하는 자가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는다. 두 영화는 냉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세기로 나아가는 마지막 길목인 1990년대 후반, 재난과 전쟁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성 텍스트였다. 그 방식이 적절했는가를 판단하는 건 주체로서의 관객, 즉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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