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살기, Aalto University
얼마나 가고 싶었냐면,
정말로 내 인생에서 반드시 꼭 이뤄야 할 일중 하나가 "교환학생 가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내 인생 처음으로 교환학생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집에 돌아와 단숨에 읽었던 책이 있었는데, 바로 [예은이는 10대에 새로운 미래를 보았다]라는 책이었다.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제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 다시 찾아보니 책 표지에는 너무나 자극적 이게도 "누구나 교환학생 공짜로(?!) 갈 수 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당시의 나를 충분히 홀리고도 남을 만한 문구였다. 책의 내용인 즉,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저자가 교환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경험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인데,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돈이 많지 않더라도 누구나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머나먼 나라에서 범상치 않은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다는 것이 정말 재미있어 보였고, 나에게는 무척 솔깃하고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외국에서 공부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교환학생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몰랐으니 엄청난 변화를 책 한 권으로 맞았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나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언젠가 교환학생에 가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다가 3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진짜로 교환학생을 가기 위한 무언가 준비(정확히 말하면 영어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그전까지는 수능을 위해 공부한 것이 영어의 전부였고, 평생 토플(TOEFL)이나 아이엘츠(IELTS) 같은 시험을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한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2달 동안 토플시험을 준비하게 되는데,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치렀던 내 생애 첫 토플 점수는 40점대였다. 주룩...
여기서 두 배로 점수를 올려야 했기에, ‘과연 할 수 있을까?’, ‘시간이 너무 모자란 건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겨울방학을 지나 다시 봄학기가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나는 토플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즈음에는 이미 교환학생 후보자 모집은 마감돼 지원할 수 없었으며, 4월 초에 있을 추가 모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추가 모집은 남는 자리가 있어야만 열리기에 운이 따라야만 했다. 당시의 나는 내 평생의 꿈 중 하나였던 교환학생을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교환학생을 가겠다는 마음으로 플랜 F까지 만들었다.
멋지지 않은가 저 플랜. 나의 간절함이 묻어난다.
나는 ‘혹시나’의 사태에 대비해 머리를 굴려 여러 방안을 생각해보았다. 핀란드(Finland)에 갈 수 없다면, 영국에라도 갈 생각이었고, 두 군데 모두 갈 수 없다면 졸업을 미루거나, 혹은 빠르게 졸업한 뒤 유학을 가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영국 교환학생의 경우, 미술대학 주관으로 영국 UAL(University of the Arts London)에 갈 수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었으며 모집 마감이 5월이었지만, 1년짜리 프로그램이었기에 되도록 지원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찾아낸 6가지 대안을 다 적고 보니,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아무튼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마음의 배리어(안전용 울타리 같은 것)를 만들어 뒀기 때문에 어떻게 되더라도 낭떠러지로 떨어지진 않겠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6개 중에 어느 쪽이 되더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 같았다.
한편, 당시의 나는 필요한 토플 점수를 얻을 때까지 2주마다 한 번씩 토플을 치르고 있었으며 (토플시험은 2주마다 한 번씩 있으므로, 내가 응시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봤던 것. 비싼 토플 응시료를 결제할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미 모집 기한에 늦어서 추가 모집에나 지원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4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주말에 있을 나의 6번째 토플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때마침 경영대학의 게시판에는 교환학생 후보자 추가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그 공고에는 추가 모집 마감이 바로 다음 주라고 되어있었고, 그때 내 머리를 스쳤던 생각은 한 마디로 ‘망했다’였다. 주말에 토플을 치르면 성적표는 2주 후에나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모집 마감에 늦어질 게 분명했다. '이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결국 교환학생에 갈 수 없는 건가 봐!'라는 생각에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나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친구가 “가서 영업하고 와!”라고 조언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풀어쓰자면, “담당자분께 가서 너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지원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와”라는 뜻. 그렇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를지도 모른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은 나는 곧바로 교환학생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대외협력실로 눈을 반짝이며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교환학생 추가 모집에 지원하려는 학생입니다. 제가 이번에 핀란드 알토대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제 토플이 79점으로 조금 모자라서요. 그래서 이번 주말에 토플 시험을 볼 예정인데 그러면 2주 후에 성적표가 나와서 마감에 늦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렇다면 우선 지금 있는 성적표로 지원하세요.”
이럴 수가.
이렇게 간단하게? 영업하러 오지 않았다면 정말 크게 후회할 뻔했다. 나에게 영업하러 다녀오라던 친구가 너무나 고마웠다. (참고로 그 친구는 나보다도 1년 반전에 핀란드 헬싱키대학교(University of Helsinki)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였다.) 그리고 이번 일에서 내가 느낀 교훈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안 되는 일 같아 보여도 일단 한 번은 두드려봐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안 될 거라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결국 안 됐겠지.
두 번째는 세상 일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 만약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시스템이었다면 달랐겠지만, 인류에게는 다행히 융통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잘 말씀드려야 좋을까. 단칼에 안 된다고 하시면 어쩌지? 그래도 지원하면 안 되는지 말씀드려볼까?’ 등등등. 짧은 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담당자분이 흔쾌히 편의를 봐주셨다.
사실 여기에도 매우 운이 따랐다. 만약 이미 알토대학교를 지원하는 학생이 많았다면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핀란드에 굳이 가고 싶어 하는 학생이 없어서, 알토대학교는 총 3명을 모집하는데도 지원자는 오직 나 혼자 뿐이었다. 담당자분께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의 입장에서는 매년 교환협정교와 학생을 주고받으며 지속적인 교류를 해야 함에도 지원자가 없어서 곤란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참에 한 학생이 지원을 하겠다고 나타났으니, 흔쾌히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그렇게 지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통과한 뒤, 알토대학교의 교환학생 후보자로 뽑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후보자로 선발된 학생은 알토대학교에 지원서와 학업계획서(Statement of Purpose)를 제출하고 최종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다행히 아무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이렇듯, 사실 내가 교환학생을 가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쉽게 순탄하게 이뤄졌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다소 부끄러운 이야기임에도 굳이 이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여러분 중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나를 보면서 용기를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더불어, 먼 산너머 어딘가에 사는 어떤 대단한 사람만이 교환학생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주고 싶었다. 사실 나의 경우는 철저하거나 대단한 편이었다기 보단, 그저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더 적도록 하겠다. 그리고 결국에 내가 1 안대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것에 무척 고마웠다. 그렇게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나는 핀란드 알토대학교(Aalto University)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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