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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애 Jun 30. 2020

Q:스펙(specification)에서 자유로운 가요?

A:아니요...ㅠㅠ

나는 첫 번째 시간이면 항상 학생들에게  대학 가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를 묻는다.  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장래희망을 정하고, 선생님의 설득으로 학교를 정하고, 성적에 맞춰서 학과를 정했다.  s로 시작하는 승용차의 s와 Ⅲ 엠블램을 떼어 몸에 지니고 있으면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하거나, 300점 이상의 고득점을 받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미신 때문에 거리에는 “ONATA” 차량이 돌아다녔고 급기야 해당 자동차 영업소에서는 엠블램을 다량 확보해 피해 운전자에게 나눠주는 진 풍경이 펼쳐지기도 했고, 여학생의 방석을 깔고 수능 시험을 보면 잘 본다는 근거 없는 미신 때문에 고3 내내 여학생들은 방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썼으며, 남학생들은 늦은 저녁 여고 교실을 종종 침입했고, 선생님들은 못 본 척 경고만 주고 돌려보내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나도 공부 열심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생각하며 공부만 했던 거 같다. 그런데 고3이 되던 해 봄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고, 장녀인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으니 내가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 몰래 선생님 몰래 대학을 포기했었다. 답답하셨던 선생님이 급기야 엄마에게 전화를 하셨고, 2년제 전문대학을 가서 빨리 취업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전문대학을 가서도 친구들은 동아리 활동이다 성적관리다 스펙이다 정신없을 때 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며 학교 수업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그리고 다행히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그런데 막상 직장에 들어가 보니 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학위도 없고, 이력서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스펙도 없다. 취미와 특기도 겨우 썼던 거 같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바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만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여동생도 대학을 졸업해 취업을 하고 남동생의 군입대 덕분에 집안 형편이 조금 여유가 생겼다 싶었을 때 엄마에게 용기 내어 말씀드렸다. 지금이라도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나도 남들처럼 스펙 쌓고 싶다고.... 그래서 난 막냇동생과 비슷한 또래와 함께 대학을 졸업했다.


돌이켜보면 난 뭐든지 늦게 시작하는 거 같다. 공부가 그리고 영어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고 나니 재미있다. 그 재미를 고등학교 때 느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무튼 늦게 깨달은 공부에 대한 흥미 덕분에 난 멋지게 사표를 던지고, 그동안 모은 적금까지 탈탈 털어 어학연수를 떠나 그렇게 싫어했던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TESOL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운 좋게 어학원에 강사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어학연수는 명함도 못 내밀고, 외국에서 학교를 마쳤거나 영어 전공에 대학원 출신도 있는데 나만 비전공자다. 강의실에서 아이들과 수업할 때는 재미있는데 왠지 교무실에 들어갈 때는 불편하다. 이제야 겨우 남들 다 있는 학위도 있고, 외국에 나가 공부도 해 봤으니 집을 짓고 안전 궤도에 있는 ‘완생’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불완전체인 ‘미생’이었던 거다. 그래서 난 또 한 번의 도전을 해 보기로 했다. 대학원 입학! 호기롭게 4군데나 원서를 냈고, 보기 좋게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학부 때 전공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해엔 좀 더 준비를 잘해서 원서를 내야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한 나의 한숨을 덜어주겠다던 사범대 나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배가 묻는다. 왜 대학원을 가고 싶은 거냐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선배가 한 이 질문을 면접관이 했었다. 왜 대학원을 지원했냐고. 너는 JOB도 있고,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췄는데 굳이 대학원을 지원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래서 난 선배에게도 면접관에게도 똑같은 답을 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영어가 좋아졌고, 영어가 좋아지니 남들에게 영어는 재미있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내가 영어를 전공하지 않아 좀 더 공부해서 당당해지고 싶어 대학원을 지원하게 되었다’라고 말이다. 그러자 선배가 말한다. “야!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네가 정말로 공부가 더 하고 싶으면 나중에 심리학 공부나 해. 그게 학생들 가르치는데 훨씬 더 좋을 거야. 그리고 네가 정말로 당당해지고 싶어서 대학원 가려는 거야” 그렇다. 난 사실 당당해지고 싶다는 핑계를 내세워 화려한 스펙이 필요했던 거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좀 더 돋보일 수 있는 스펙.


가끔 학생들이 혹은 학부모님이 내 최종학교와 전공은 영어임을 확인하고자 할 때면 난 사실대로  말한다. 전공은 영어가 아니라고, 학교 졸업하고 외국 나가서 공부하고 왔다고. 처음에는 조금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 내 이력을 흥미로워하고 나에게서 희망을 얻는 듯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보다 더 좋은 내신 등급과 수능성적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렇다. 대학원을 굳이 안 갔지만 난 학생들에게 충분히 꽤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지금의 나를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난 용기를 못 낼뿐, 포기를 한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대학원 입시요강이 발표될 때면 여기저기 대학원 홈페이지를 기웃거린다.


그래서 궁금하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은 스펙에서 자유로운지. 자유로우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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