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운백년 Oct 01. 2023

누군가 읽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글


긴 명절 연휴를 맞이해 본가에 내려왔다. 이번 추석은 나름 특별했다. 공동집필이긴 하나 드디어 첫 책이 나왔고, 가족에게 처음으로 전달할 참이었다. 때늦은 기차예매로 저녁 늦게서야 본가에 도착했고, 짐을 풀기도 전에 아버지는 ‘책을 보자’며 들떠 계셨다. 책을 실물로 받고서도 실제로 나왔다는 소식을 전한 적은 없었기에, 흘러가는 말로 추석쯤 책이 나올 것 같다고 했던 내 말을 아버지가 기억하고 있었단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세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자랄 적에는 오히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에 가까웠는데, 나이가 들수록 모르는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아버지의 들뜬 목소리가 괜히 부담스러워진 나는 방에 들어가서 한참 옷을 갈아입고 짐 정리를 했다. 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싶었다. 책을 쓴다는 이야기를 안 한 것도 아니고, 딱히 부모님이 반대한 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민망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눈을 딱 감고 책을 내밀면 끝날 일인데, 그게 맘처럼 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에 만족하지 못해서일까. 괜히 내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여러 마음이 순식간에 오갔고, 더는 그 순간을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 서야, 부모님께 책을 내밀었다.

“독립출판물이라 대형서점에 쫙 깔리는 건 아니고, 온라인으로 구매하거나 독립서점 같은 데서 책 살 수 있어요.” “혼자 쓴 건 아니고 여러 명이 같이 쓴 책이에요.” “인세를 받긴 하는데 책으로 돈 벌긴 어려워.”

부모님의 이런저런 질문을 피하려 묻지 않은 것까지 서둘러서 와다다 쏟아냈다. 혹시 베스트셀러라도 되면… 이라는 엄마의 말은 칼같이 잘라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뭐가 그리 불안했는지 몰라도, 나는 두 분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또 무엇을 물어볼까,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나,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는 괜한 희망을 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대답했다. 작은 희망마저 싹둑 잘라냈다. 뒤따라오는 질문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신기하다며 책을 한참 들여다봤다. 나보다 더 소중하게, 더 신기하게,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고이 모셔두었다.

간결하고 건조하게, 참 멋없었던 책 증정식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직 동생이 오지 않아 미처 전달하지 못한 책이 남아있었다. 책을 보며, 나는 무엇이 그리 민망하고 낯 뜨거운 건지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께 했던 말은 결국 나에게 하는 말인 셈이었다. 책은 돈이 될 리 없고, 온전히 혼자 쓴 것도 아니니 그만큼 소중함도 덜하다고 생각했고, 이걸로 유명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선고 내리듯 내뱉은 말이었다. 아마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실현되지 않을 기대를 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괜한 희망을 품고 있던 건 나였을까.

다음 날 아침에는 내 글 중 한 편을 읽은 어머니의  ‘어제 글 한 편 읽었는데…’로 시작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는 또다시 어머니의 말을 칼처럼 잘라냈다. 오히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듣는 말보다, 나를 아는 사람에게서 듣는 글에 대한 이야기가 싫었다. 나의 유약함과 못난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미 글로 썼으니 괜찮지 않냐,며 반문했지만, 나는 대화를 원해서 쓴 게 아니었다. 그저 글은 글로써 읽고, 나를 이해하면 그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단호한 대화의 뒤에 씁쓸한 사탕을 머금은 것처럼 혀가 쓰렸다. 책을 바라보는 일조차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마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자꾸 무엇을 그리 감추고 숨기고, 떳떳하게 마주하지 못하는가. 내 글과 책에 어떤 마음을 담았기에, 자꾸만 그 뒤로 몸을 숨기고 싶어 하는가.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저 글이 아니라 책이라는 형태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다. 오히려 쓰지 않은 이들이 더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처럼, 나도 당당하게 글 앞으로 나설 수 있다면 더 좋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자꾸 글 뒤로 숨고 싶어지는 기분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누구나 겪는 과정이어서 숙명처럼 나도 이겨내야 할 감정이라면, 무엇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고 인쇄하고 책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일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쓰고 타인에게 내비치고 그 앞에 당당하게 서는 일련의 과정을 지침서처럼 알려준다면 좋겠다는 다소 유치한 생각을 하는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드디어 첫 책이 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