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에 관하여
아이스 커피를 든 손이 시리게 느껴지는 계절이 오면 내년에 사용할 다이어리들을 고르기 시작한다. 어언 15년을 이어가고 있는 중요한 연례 행사다.
쓰임 목적을 나열한 뒤 구매할 다이어리의 총 수량을 정하면 본격적으로 이 연례 행사의 막이 오르는데, 각각 어떤 제품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과정은 신나는 동시에 괴로움의 연속이다. 하나 둘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 내년 다이어리들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며 내년을 함께할 새 친구를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으니 신나고,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색을 입고 존재를 뽐내는 다이어리들을 모두 데려갈 수 없으니 괴롭다. 적합한 내지 디자인이 있는지, 표지 디자인이나 색상이 예쁜지, 종이 재질이 좋은지, 일자로 쫙 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제본이 튼튼한지, 만년형인지 등을 살펴보는 건 기본. 올해 사용한 다이어리와의 의리를 지킬 것인지, 새로운 다이어리를 골라 변절자가 될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걸 검토했더라도 자신을 데려가라며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내는 수많은 다이어리에 쉽게 미혹되고 만다는 거다. 이성을 붙잡고선 효용성과 예산을 따져보다 조용히 매대에 내려놓고 상점을 나오는 데 성공했더라도 이후 미련이 가시질 않아 귀갓길 내내 타인의 구매후기를 찾아보다가 결국 온라인 스토어에서 구매하는 생뚱맞은 날들이 12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와중에 한정판 컬러라거나 다시는 출시되지 않는 마지막 버전이라는 설명까지 붙으면 이겨낼 재간이 없다. 지갑은 어느 새 활짝 열려있고 또 하나의 다이어리가 책상 위에 놓인다.
다이어리를 좋아하는 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하늘 아래 같은 다이어리는 없고 모두 쓸 데가 있다. 누군가 이걸 다 사용할 수는 있느냐고 물으면 '다 필요해서 산 것'이라고 합리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계획조차 없던 쓰임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서라도 가지고 싶어지는 물건이라면 금세 아른거릴 게 분명하니 빠르게 품는 게 약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부터 다이어리에 이토록 진심이었을까.
나의 첫 번째 다이어리는 학교 앞 문구사에서 파는 사천 원짜리 에폭시 다이어리였다. 미끈한 광택과 은은한 반짝이 펄, 유행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외양에 나를 비롯한 많은 어린이들이 열광했다. 다이어리를 여며 잠글 때 나는 똑딱이의 '똑!' 소리는 어찌나 경쾌했던지. 생일을 맞은 친구가 선물들의 포장을 끄르면 다이어리 세트가 매 번 나왔을 정도로 당시 유행했다. 또래 여자 아이들끼리는 우정을 증명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중요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다이어리를 가진 친구들끼리만 각기 다른 디자인의 속지를 교환하고, 서로의 내지에 편지를 적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외되지 않고 인기를 얻고 싶었던 열 살 초등학생도 예외 없이 다이어리를 샀지만, '인싸'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과했던 나머지 친구들에게 속지를 모조리 뜯어주고 말았다. 살점이 모조리 뜯겨 가죽만 남은 초식동물을 측은하게 보듯, 덩그러니 남은 표지를 보고 시무룩해하던 나는 금세 다이어리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다시 다이어리와 친해진 건 갓 중학생이 된 봄, 인터넷 강의를 등록하고 사은품으로 받은 스터디플래너 덕분이었다. 표지에 사이트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데다 얇은 종이들을 스프링으로 얼기설기 엮은 노란색의 작은 수첩은 투박했으나 조숙한 열네 살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교복을 입고 플래너를 끄적이니 왠지 성숙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공부 계획 나열과 그 옆의 O, X 표시가 대부분이었던 나의 기록은 점차 '기상 및 취침 시간', '날씨로 표현하는 기분', '일정을 적어보세요' 칸까지 확장됐고, 마지막 장을 쓸 때쯤엔 맨 아래 위치한 '오늘 하루 어땠나요?' 칸을 가장 좋아하게 됐다. 그 날의 학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각성하는 것이 해당 칸의 존재 이유였을 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하루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화들과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쪼잔한 감정들을 미주알고주알 적어넣었다. 타고난 성정이 유약하고 소심해 자주 힘들었던 청소년 시기의 나는 자유롭게 흔적을 남기며 위로받을 수 있는 아담한 공간에 금세 재미를 붙였다. 이듬해에는 무지 칸이 체크리스트 칸보다 넓은 정사각형 모양의 플래너를, 그 다음 해에는 분홍색 인조가죽 플래너를, 그 다음엔 보라색의, 연두색의, 그리고 다시 분홍색의 플래너를 샀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선 목표 대학 로고 스티커가 포함된 입시 업체의 플래너를 선착순 배부한다는 소식에 알람까지 맞추고 생애 첫 티켓팅을 했다.
스무 살부터는 스터디플래너와 작별한 후 다양한 형태의 다이어리에 도전했다. 일정 체크리스트와 일기를 동시에 적을 수 있는 위클리 다이어리, 형태의 제한 없이 너른 장에 글자를 풀어넣을 수 있는 데일리 다이어리, 많은 것을 쓰기엔 귀찮지만 최소한의 기록을 남기고 싶을 때 좋은 먼슬리 다이어리 등. 용도에 따라 업무 다이어리와 운동 다이어리, 독서 다이어리 등을 몇 권씩 더 추가해 사용해보기도 했다. 십 대와 이십 대의 일기는 글씨체도, 등장하는 배경과 사람들도, 고민의 범위와 깊이도 모두 달라졌지만 여전한 것도 있다. 매 년 정성스레 다이어리를 고르는 순수한 욕심과 단 한 줄이라도 그 날의 마음을 기록하려는 단순한 열정 같은 것.
유독 힘들었던 날의 일기는 그 날의 페이지에 봉인시켜 오늘의 괴로움을 덜었고, 반대로 어떤 날의 일기 속 문장들은 굳이 끄집어내 몇 번이고 되뇌인다. 잔바람에도 크게 흔들렸던 사춘기를 지나 이상과 현실 사이를 재며 자주 외로워졌던 수험생 시기에도, 다수가 말하는 성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어 끝모르고 달려왔음에도 여전히 어렴풋한 미래에 불안으로 가득했던 취업준비생 시기에도, 그리고 나의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배우고 묵묵하게 싸우는 중인 매일 매일, 지금 이 순간에도…. 꾹꾹 눌러 쓴 글자들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다이어리의 두께만큼 나 또한 두텁게 성장해왔다고 믿는다.
이사가 잦아 불가피하게 과거의 다이어리를 일부 떠나보내긴 했지만, 살아남아 보관 중인 다이어리를 펼치면 당시 어떤 일이 있었건 힘껏 살아낸 내 생의 한 시절이 고스란히 펼쳐져 더없이 숙연해진다. 즐거움과 자랑스러움은 물론 슬픔과 부끄러움, 과거 치기어린 순간까지 묵묵하고 너그럽게 품어준 나의 작은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현재는 먼지가 돼 사라진, 가장 무성의한 생김새였으나 일상을 무던하게 기록하는 기쁨을 알려준 사은품 출신의 노란색 스터디플래너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