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멈춘 날
두렵다. 불안하다. 귀찮다.
내가 뽑은 색깔 카드를 뒤집자 이 같은 감정들이 쏟아졌다. 재미로, 제대로 어떤 심리검사를 해도 늘 따라오는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독서동아리의 그림책테라피 수업에서도 어김없이 발각됐다. '감정호텔' 그림책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들을 나누는 수업에서 나만 부정적인 감정들을 골라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두 발을 포개어 발가락에 힘을 꽉 준다. 양말에 감추어진 내 발가락의 긴장은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림책의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사람들은 슬픔, 불안의 장면에서 멈춰 섰다. 긍정적인 감정들을 고른 이들도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슬픔과 우울, 가려진 감정들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한 사람은 어느 날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잠을 잘 자나요?' '식사를 제시간에 하나요?' 라는 뻔한 질문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말했다. 그 뻔한 질문을 물어봐주는 사람이 그동안 없었고 외로움이 갑작스레 밀려왔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발가락의 힘도 조금씩 풀렸다.
책에서 불안과 함께 오는 다양한 감정들이 버거울 때면 감사를 찾아가라고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불안이 과거의 상처와 기억, 미래의 걱정과 두려움에서 오기 때문에 '현재'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곁에 있는 사람들에 집중하라는 의미일터. 안 그래도 어제 오랜만에 통화를 한 친한 언니가 요즘 감사를 더 깊이 있게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당연한 것들에 대한 감사가 쉽지는 않다. 공기와 햇빛, 가족과 일상, 누군가의 미소와 위로, 커피 한 잔ᆢ 나는 그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고와 병이 없는 하루도, 전쟁과 가난이 없는 이 순간도 당연하지 않은데 말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당연하게 지켜지고 유지되는 것일까? 난 별다른 노력도 안 하고 생각 없이 살고 있는데. 그 의아함에 두 발은 이미 살짝 떨어져 있다.
마지막에 강사는 자신의 감정을 색깔로 표현해 보고, 나의 감정에 편지를 써보라고 했다. 어떤 이가 다양한 색깔들을 알록달록 칠하다가 그 모든 걸 흰색으로 덧칠했다.
"흰색으로 다 덮어버리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지금까지 내 감정들을 드러내지 않으면 자연스레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나 봐요. 조금 더 용기 내서 내 감정들을 만나봐야겠어요."
강사는 '머무르다'라는 단어를 꺼내며 말했다. 나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충분히 머무르고 쉬면 다시 또 힘을 낼 수 있다고. 나에게 다가오는 감정들을 서둘러 보내지 않고 살펴봐 주는 게 필요하다면서 수업을 마쳤다. 이어 아들의 영어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들어서는데 사서선생님이 그러신다.
"어머님, 오늘 표정이 왜 이리 밝으세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가벼워진 두 발을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