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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숙 Aug 06. 2020

201442-170493

“엄마는 왜 집에만 있어?”

5살 딸이 나에게 물었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궁금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엄마가 집에 없으면 소원이 혼자서 다 해야 하는데? 유치원도 혼자 가야 하고, 밥도 혼자 먹어야 하고, 세수도 혼자 해야 해. 할 수 있겠어?”
“응. 나 잘해.”
“맞아, 소원이 혼자서 잘하지. 그럼 엄마도 아빠처럼 회사에 가야겠다.”
“음....... 아니야. 엄마는 집에 있어. 나 혼자 집에 있으면 외롭거든.”

맞다. 난 지금 이 집의 공허함 혹은 5살 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그 외에도 살림과 육아를 도맡고 있지만 그건 딸에게도, 아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중요한 일처럼 보이진 않을 것이다. 치우고 뒤돌아서면 다시 어질러지는 집안처럼 나의 노동의 결과물은 바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그런 명언이 있지 않은가, 집안일은 해도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바로 티가 나는 보람 없는 일이라고.
두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서른여덟의 나는 벌써 5년째 ‘집에만’ 있다. 육아휴직 중에 복직의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아이가 너무 어려서, 봐줄 사람이 없어서, 남편이 해외파견근무 중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미루다가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서운하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이’였고, 내 인생의 목표는 ‘아이를 외롭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혼해서 5년 만에 시험관 시술을 통해 가진 나의 아이들은 그 오랜 기다림의 끝이었고, 그 끝에서 엄마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곧 펼쳐질 듯 보였다. 난 절대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늘 아등바등 사느라 자식에게는 무심했던 엄마, 그런 엄마의 눈길과 손길에 목말라 있던 어린 나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역은 '엄마는 왜 집에만 있어?'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입니다.

하지만 딸의 질문은 살짝 잠든 사이에 들리던 도착역 안내방송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지금 나는 ‘여덟 살의 나’가 아니라 ‘서른여덟 살의 나’다. 지나간 상처에 대한 위로, 목마른 사랑에 대한 욕구를 내가 아닌 아이에게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딸의 순수한 질문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시험관 시술, 퇴사, 주부. 내가 선택한 것들을 엄마의 위대한 사랑이나 대가 없는 희생쯤으로 나름 잘 포장해왔다. 하지만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싶고, 참은 만큼 위로받고 싶고, 포기한 만큼 기대하고 싶은 게 내 진짜 속내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공부야말로 ‘소원이 엄마’가 아니라 ‘김민숙’을 찾는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위로받고자 애쓸게 아니라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육아로 중단했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에 재입학했다. 201442-170493. 학번을 찾았고 이름도 찾았다. 유치원 선생님의 꿈을 안고 공부하는 그곳에서 난 이미 ‘민숙쌤’이라 불렸다. 나만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니라 교수님도 학생들도 서로를 그렇게 불러주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아이를 돌보면서,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서로를 인정해주고 위로해주었다.
방통대는 강의와 수업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지지만, 유아교육과는 특성상 매 학기마다 출석수업이 필수적이다. 마지막 출석수업 날, 하필 난 교사로 선정되어 모의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나는, 도저히 진정이 안돼서 수업계획안을 내려놓고 아이 사진을 물끄러미 봤다. 7명의 조원들이 내 아이라고, 내 아이의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엄마처럼 잘 들어주고 웃어주자. 어찌어찌해서 모의수업은 끝났고, 뒤이어 교수님의 평가가 이어졌다. 교수님은 내 어깨를 짚으며 말씀하셨다.

혹시 현장에 계신가요?
“아니요, 집에 있는데요.”
“아, 네. 하하. 교사의 표정이 정말 밝고 풍부했어요. 아이들에게 눈 마쳐주고 반응해주는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수업계획안대로 수학적 탐색, 결과, 평가 요소를 잘 드러냈어요. 지적할 것 없이 너무 잘하셨습니다."


그제야 허기가 밀려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친구들, 잠시 멈춘 공부나 취미, 버리지 못하는 유행 지난 옷들에서까지. 그 당시, 그 순간에 내가 선택한 것들이, 아직 놓지 못한 것들이 일말의 희망처럼 나를 빛나게 해 줄지 모를 일이다. ‘집에만’ 갇혀 있던 나의 생각과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한걸음 내디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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