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적 꿈이 결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재미없는 직장인‘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내뱉고 나니 싫다, 싫다 하면서도 결국 하루 과업이 표시된 체크리스트를 모두 완료했을 때 희열을 느끼는 내 모습이 떠올라 웃기다. 거의 ‘김모순’이 따로 없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건 나는 직장인 또는 회사원이 꿈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30년간 호기심과 깡 하나로, 내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진로와 적성 사이에서 표류한 김 씨. 의사, 만화가, 댄서, 작가, 승무원 등등 별에 별 꿈을 거쳐 ‘잠시’ 평범한 회사원에 정착한 김 씨의 꿈 표류기를 들어보시라.
때는 바야흐로 김 씨의 8세 시절, 동네 치과에서 앞니 2개를 한 번에 뽑힌 충격적인 기억이 있다. 원체 성격이 덤덤해서 불주사를 맞을 때도 울지 않은 나다. 그런데 치과는 태어날 때부터 무서웠다. 분명 인간에게는 치과를 무서워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기절 직전까지 울다가 앞니 2개가 한 번에 두두둑-! 하며 뽑혀 나갔을 때 정신도 함께 뽑혀나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치과가 떠나가라 울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빠 차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키득거렸다. 앞니가 빠진 자리에 외로이 남은 달랑거리는 잇몸을, 혀로 매만지며 정신없었던 병원을 떠올렸다. ’의사 선생님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나 같은 어린이를 볼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릴 때 꽤나 왈가닥이었던 나는 어깨도 빠진 적이 있다. 누구는 살면서 한 번도 안 빠진다던데, 무려 두 번이나 빠졌다. 처음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둥글게 둥글게’ 놀이를 하다가, 두 번 째는 냉장고 문을 열다가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마지막으로 팔이 빠졌을 때는 꽤 늦은 저녁이었다. 하지만 그 늦은 시간에 응급실에 가는 건 엄마 아빠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내가 부자연스럽게 누운 채 식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본 엄마는 곧바로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결국 나는 아픈 사실을 숨긴 잘못으로 혼나며 2배로 서러운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공포스럽게 의사 선생님을 기다렸다. 이미 두 번째 경험으로서, 마취도 없는 상태에서 탈골된 뼈를 원상복구 시키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알기 때문이다. 그때 저 멀리서 안경을 낀, 조금 무뚝뚝해보이는 의사 선생님과 든든한 간호사 언니 두어 명이 오시더니 내 팔을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선 “끼울게요” 한마디를 하시더니 갑자기 사정없이 마구 두 번 정도 뺐다 끼웠다를 반복했다. 정신없이 세상이 흔들리는 와중에 선생님의 표정은 굉장히 평온해 보이셨다. 그리고 제자리를 찾은 내 어깨를 부여잡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 다시 갈 길을 가시는 의사 선생님을 바라봤다. 뒷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였는데, 고된 하루를 보여주는 엉킨 머리가 현대 예술 작품처럼 한껏 위로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우리 집은 참 병원과 인연이 깊다. 말 그대로 아픈 사람이 많았다. 할머니, 엄마, 할아버지, 동생이 돌아가면서 골골거렸다. 그런 사람들이 다들 병원에 의존하는 걸 보며, 내가 의사가 되면 무적이 될 것 같았다.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잠시 영웅과 같은 그런 환상이 생긴 듯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가 되려면 일단 좋은 대학을 가야 하니까. 하지만 의사 하나만을 바라보기엔 자랄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내 흥미와 호기심은 다양해져만 갔고 정작 내 심장이 둥둥거리며 반응했던 건 만화나 영화, 노래 그런 것들이었다. 모아놓고 보니 좋아했던 것들은 죄다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어느 날 같은 중학교에 다니던 단짝 남자애가 나에게 네이버 웹툰을 알려줬다. 그건 조석 작가님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보란 듯이 웹툰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그 웹툰을 시작으로 <싸우자 귀신아>를 보며 눈물을 훔쳤고, <정열맨>과 <패션왕>을 보며 날것의 향기에 이끌렸다. 그 외에도 <프리드로우>, <연애혁명>, <죽음에 관하여> 등등 나만의 포인트로 꽂힌 콘텐츠를 매주 요일별로 챙겨봤다. 그러다 나는 웹툰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고, 빈 공책을 사서 만화를 직접 연재했다. 쉬는 시간에도 그렸고, 시간이 안되면 집에서도 그렸다. 유머와 공포. 두 장르였다. 내 공책 만화책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수많은 아이들이 돌려봤다. 다른 친구 책상에 비죽 삐져나온 내 만화책이 보이면 어찌나 뿌듯하고 반갑던지.
창체(CA) 시간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만화부에 들었다. (여담으로, 그 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강철의 연금술사’를 처음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철학적인 내용에 놀랐다. 그 이후 10년 넘게 비슷한 애니메이션을 찾아 헤매다 몇 년 전 한국을 강타한 ‘귀멸의 칼날‘에 완전히 꽂혀 잠시 미쳐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캐릭커쳐’를 배웠고 안 그래도 교과서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본격적으로 그림에 빠져 여기에 박차를 가했던 것 같다. 책 모서리에는 움직이는 스톱 모션 그림도 그리고, 교과서에 나온 인물들의 스타일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멋지게 꾸몄다. 그러다 ’내가 나중에 웹툰을 그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직감상 말로 꺼내기도 전에 현실적으로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부모님께서 안 좋아하실 것 같았다. 역시나 저녁을 먹다가 엄마께 슬쩍 떠보듯이 ‘나 웹툰 그리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말을 꺼낸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날 밥 먹다 말고 아주 그냥 엄청 혼났다. 밥 굶을 거냐고 하셨던 것 같다. 그 당시만 해도 웹툰이 지금처럼 대중화가 되기 전이라, 우리 어머니가 듣기엔 내가 ‘고흐’가 되겠다고 들렸을 수도 있다. 귀 잘린 김수현이 떠올랐으려나.
그럼에도 나는 아직도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한다. 컴퓨터 그림판 마우스로, 아이패드로, 붓펜으로, 네임펜으로, 4B연필로도. 도구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첫 회사에서는 메신저 프로필이 허전해 보여서 직원 20명에게 그림판으로 얼굴을 그려줬고, 나 혹은 누군가가 퇴사하거나 이직할 때면 꼭 그림을 같이 그려서 편지를 전했다. 효과가 있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플러팅(?) 중 하나로 관심 있는 이성에게는 뜬금없이 휴지조각에 캐릭커쳐를 그려서 선물하곤 했다. 가끔은 누군가가 그렇게 손수 그리면 너무 힘들지 않냐는 이야기를 듣지만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 이유에는 단 몇 초만에 슥슥 그릴만큼, 평소 그 사람을 애정 있게 바라본다는 나만의 표현 방식이고 내 진심이니까.
초등학교 때 엄마의 권유로 가게 된 첫 댄스학원에서 엄정화의 'D.I.S.C.O'와 이효리의 'u-go-girl'을 배웠다. 연습실 전체를 울리는 베이스 소리와 스피커가 터질 것 같은 음악에 나는 완전히 정신이 홀렸고, 난생처음 짜릿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사실 그전부터도 무대를 정말 좋아했을 수도 있다. 나는 조금 이상한 구석에서 소심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준비된 무대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때가 좋았다. 유치원 때는 친구들에게 구연동화 읽어주는 대회에는 꼬박꼬박 참석했고, 온갖 학예회부터 운동회 때마다 연례행사였던 '꼭두각시'나 '부채춤'은 내가 제일 돋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동작을 하나도 틀리지 않기 위해 늘 남아서 연습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렇게 정신없이 까불기를 좋아하던 내가 입시를 위해 그 많던 흥을 꾹꾹 눌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가 너무 지겨워지던 시점에 f(x)라는 오묘한 걸그룹에 빠져서 (특히 ‘NUABO’라는 노래)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MP3를 연결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당시 숫기 없던 모습만 보였던 내가 갑자기 몸을 흔들고 있으니 반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갑자기 쟤가 춤을?’하는 눈빛을 읽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친구에게 안무도 알려줬다. 체육 시간 때는 더했다. 나만의 고삐가 풀리는 합법적인 시간이었다. 체육 수업 후 남는 시간에는 선생님께서 꼭 최신 노래를 틀어주셨는데, 아는 노래가 나오면, 특히 티아라의 ‘Roly-Pply’만 나오면 무대로 뛰어나갔다. 당시 학생 주임 선생님이자 체육 선생님께서도 신나게 춤을 추는 나를 보며 “참 희한한 애네! 이렇게 춤을 좋아했다고?”라고 웃었다. 그렇지만 모두들 돌아온 반응은 이제 춤은 그만 추고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추고 싶은 춤은 꼭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나는 오밤중에 옷장에 붙은 작은 거울에 의존해서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안무를 따냈다. 어느 날은 너무 즐거워서 흠뻑 빠진 나머지 나의 객관적인 수준을 생각지 못하고 잠시 아이돌이나 댄서를 하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자기 객관화는 다음 날 학교에서 거울을 보다가 하루 만에 되찾았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몰래 춤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방문을 열고 들어온 아빠가 어이없게 쳐다본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새벽 2시에 공부도 아니고 도대체 뭘 하냐는 말을 던지고 다시 나가셨다. 그러고 난 후 갑자기 춤에 대한 열정을 잃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무언가 확 식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서른이 된 요즘은 또 춤에 흠뻑 빠져있다. 그때처럼 입시 걱정이나 주변 선생님, 친구들 눈치 볼 것도 없고 무엇보다 내돈내산이라 내가 듣고 싶은 수업, 내가 배우고 싶은 춤 수업에 참석해서 더 마음 편히 나를 내려놓고 춘다. 그래서인지, 동작에 힘과 긴장이 잔뜩 들어갔던 예전보단 훨씬 가동범위도 커지고 자신감도 붙었다. 마치 오해로 멀어진 친구와 어색함 없이 다시 친해진 느낌이랄까. 춤이라는 내 취미와 또 하나의 내 정체성을 온전히 다시 찾은 느낌이라 행복하다.
김 씨 ‘꿈’ 표류기 (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