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삶에 대해
아르메니아는 인구의 90%가 넘게 아르메니아의 정교를 믿는다고 한다. 아마 러시아 정교의 분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들의 신앙에 대한 마음은 내가 처음 예레반에 도착한 날에도 느낄 수 있었다. 예레반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이들이 공항에 있었다. 더는 코로나 검사가 필요 없는 관광국가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나왔다. 시내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택시를 찾아봤다. 우리나라의 카카오 택시처럼 이곳에는 얀덱스 택시가 있지만 나는 택시 어플을 굳이 사용해야 할까에 대한 의문이 깊었고 직접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었다. 여담이지만 얀덱스 택시는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많은 나라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택시를 찾는 것은 나지만, 택시 역시 나와 같이 준비 안된 사람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내가 걸어가고 있자 한 남자가 다가와 어디를 가냐 묻는다. 나는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놓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 정도 돈을 준비했다고 말을 했다. 남자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그 돈으로는 아무도 안 간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돈 밖에 없다 말하자 협상이 결렬됐다. 나는 택시 하나면 되지만 택시들은 나 같은 사람이면 계속 찾아다니기에 금방 새로운 사람이 다가와 말한다. 어디까지 가는지. 또 내가 가진 돈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시 똑같다. 분명 인터넷에서는 그 정도 금액이면 충분하다 이야기했음에도 이렇게 된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그제야 얀덱스 택시를 받아보려 했다. 와이파이를 이용해 앱을 받으려 하니 속도도 느리고 답답했다. 그 사이에 여러 차례 다른 택시 기사들이 접근을 했고 그때마다 똑같은 패턴의 대화가 흘렀다. 결국 앱 다운과 인증을 기다리지 못한 내가 졌다. 준비한 돈의 2배를 더 내며 도심으로 가기로 했다.
나를 도심으로 데려다주던 이 역시 아르메니아 정교를 믿는다고 했다. 도심으로 가는 길에는 큰 교회가 보였고 그는 운전 중 교회를 향해 성호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가 도심에 도착해 나를 내려주고 떠났고 나는 숙소에 다행히도 무사히 도착을 했다. 숙소에 도착해 내가 낸 돈에 대한 의구심이 너무 커, 금액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얀덱스 택시도 받고 공항까지의 가격을 확인했는데,,, 난 거의 10배를 냈다. 아니 10배도 더 냈다. 그 밤은 비싼 값으로 수업을 받았지만 꽤나 밤새 열이 났던 기억이다.
나를 데려다준 택시 기사뿐 아니라 공항에 있던 영업하는 기사들 대부분은 아르메니아 정교를 믿을 것이다. 그들도 아르메니아 교회를 볼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자신이 믿는 신께 감사를 표하기도 하고, 무언가 빌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실함은 내가 만약 신이라면 참 기특하다 여겼을 만큼 보기 좋았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그들에게 의문을 표한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이 믿는 신에게 따지고 싶다. 그 종교는 그들에게 정보의 불균형을 이용해 그렇게 많은 이익을 취하고 남에게는 손해를 주라고 가르쳤는가.
나는 한 번도 종교가 도덕에 어긋난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어떤 종교도 자신만 생각하고 남은 배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내로남불일지라도 이는 인간의 본능이자 이기심이지 종교의 가르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되려 그 본능에 맞서 이성을 강조한 게 종교라 생각한다. 언제나 함께 그리고 공평 또 평등 등을 가르쳐왔을 종교다.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해 깊게 모르는 나도 이렇게 배워 아는데 그들이 믿는 종교가 이와 다를 리가 있을까. 그들이 나에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 표정들이 여전히 기억이 난다. 이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말, 표정, 품은 마음이 얼마나 부도덕했는지 알고 있을까.
이들에 대한 끝 모를 분노가 점점 사그라들고, 시간이 약인 것일까, 신앙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니 그다음 내가 비쳤다. 나는 어떠한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 역시 누군가는 내가 했던 것처럼 ‘쟤 내로남불인 것좀 봐.’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지. 종교가 가르쳐준 선은 잊고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부끄럽지는 않았을지. 부끄러움을 알면 숨기지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 숨기지도 않는다. 그들이 숨지 않고 했던 행동과 말들처럼 나 역시 당당하게 하던 행동과 말들이 있었을 테다. 내 신앙이 가르쳐준 것과는 어긋난 채로.
신앙심을 갖고 그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우리가 신으로 추앙하는 예수님, 부처님, 알라 등등 신들이 갖고 있는 신성성을 우리는 지니지 못했다. 그저 그들을 닮아가고 싶은 마음을 품고 노력을 할 뿐 실제 삶은 정반대일 수가 있다. 다만 인지하면서도 행하는 악에 대해서는 스스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말만큼 쉽지는 않지만. 조정이라는 것도 어떤 것은 100이 필요하지만 어떤 것은 10만 필요하다. 상대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택시 기사들이 나에게 했던 일종의 바가지가, 그들이 신앙만큼 부끄러움을 알았다면, 바가지를 안 씌울 수는 없다면, 작게만 씌울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와 같은. 누군가 피해를 볼 수 있다면 그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는.
물론 나도 신앙인으로 합당하지 않은 삶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기도를 자주 안 하는 모습이나 예배를 드리지 않는 모습, 심지어는 성경을 자주 읽지 않는 모습 등, 신앙인의 본분을 행하지 않는 모습이 드러난다. 삶을 살아갈 때도,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게으르게 살거나, 양보하지 않는 모습 등 신앙인으로 보기 안 좋은 모습도 많다. 특히 이런 모습은 알고도 변하지 않는 나의 불신앙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신앙을 가진 택시 기사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다음으로 나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이런 모습들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라는 신의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이를테면, 금자 씨의 ‘너나 잘하세요.’와 같은. 그래 사실은 나부터인 것이다. 예수님이 말하길 죄가 없는 사람만 돌을 던지라 했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가 보이는 불신앙적인 모습에 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 같다. 물론 화는 나지만 말이다. 내 신앙이 깊다면 그 화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배웠을 텐데 시간으로만 이 화를 태워내야 하니 내 얕은 배움에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