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간의 Glimpse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아니 여행이 아닌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울란바토르에서 4박 5일을 보낸 후 지금은 여기 홉스골의 핫갈 호수 근처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습니다. 주민분과 대화도 어렵고 할게 거의 없는 심심한 동네랍니다. 내 작업 외에는 할게 많지 않습니다. 유튜브를 조금씩 본 달까요. 그래도 최대한 이곳을 느끼고 누리고 기록하려 합니다.
Glimpse; 힐끗 본다는 의미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일일이 기억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단어,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란 모든 이 아닌 일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걸어 다니며 스치는 사람들과 가로수, 거리의 상점 또 건물.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스쳐 지나간 작은 조각들로 만든 머리의 지도는 얼마나 옳을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친 것들을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일같이 보고 또 봐도 놓치는 것들이 있는데 잠깐의 스침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다줄지 물음표를 달아놓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현대에는 관광을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그 이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진이나 영상이라는 기록을 통해 인간의 망각을 보충해주지만 여전히 나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현시대가 우리의 여행을 기다려주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여행을 위해서는 기록에 의존하는 여행이 아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람은 힐끗 보는 것이다. 현지인을 만나 현지인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여행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혼자 혹은 일행 또는 숙소에서 만나는 또 다른 외지인과 어울리며 추억 쌓기를 한다. 어떠한 형태든 새로운 경험이란 유익하지만, 나에게 여행이란 현지인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에 대해 알고 가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모르는 것까지 알아가며 느끼는 것이 여행이다. 그러기 위해 유람을 넘어야 한다.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익숙해져야 한다.
4박 5일간 울란바토르도 마찬가지다. 매일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녔다. 어린아이가 개안을 하며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처음에는 몽골말(러시아어)을, 그다음에는 알록달록한 건물들을, 그다음으로는 왠지 한국인과 비슷한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울란바토르를 알아가게 되었다. 반복적으로 거리를 지나게 되었고 이를 피하고자 갈 때와 다르게 올 때는 한 번 꼬아 돌아 걸었다. 숙소 주변은 아침저녁으로 오가다 보니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혹시 내가 놓치고 못 본 것이 있을까 싶어 걸으며 주변을 계속 돌아보지만 거리는 어제 또 그제 본 거리다. 길이 나의 일상에 녹아들 때 비로소 유람, Glimpse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도시는 각 도시마다 특색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한계도 존재한다. 건물은 높아지고 건물마다 그 높이만큼 자신들이 가진 몸매를 뽐내기 위해 허리를 틀거나 배를 불리거나 한쪽으로 서있는 등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도시들 사이에서는 개성이라 표현하지만 결국 그 끝은 높은 빌딩 숲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지 않는다. 식욕을 돋우는 것은 되려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둥을 가진 빨간 옛 건물이고 바라보는 것은 빌딩 숲 사이로 난 길 저 멀리 산과 구름이다. 또 갑작스럽게 내리는 눈이다. 시선은 높이 솟은 건물에서 나의 눈높이까지 내려오고 여기서 도통 찾기 힘든 먼 유토피아 같은 자연으로 향하게 된다. 내 취향은 자연이다. 공항에서 도시로 오는 길 지나던 말들의 방목지와 설산이 내 마음이 향하며 내가 서있고 싶은 곳이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내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들어가는 것도 안 봐도 알 수 있는 것 같다.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 세계일주를 하는 나의 다짐이다.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아깝게 보내지 않고 알맞게 보내도록 하는 것인데, 태생이 나태하고 게으른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시작이 반인 것을 감안하면 나의 본성을 이기는 이성을 마주하는 것 같아 반갑다. 매일 걸어 익숙한 거리도 혹시 모를 사진 한 장을 위해 또 혹시 지나쳐버린 새로운 곳으로의 이끌림을 위해 다시 한번 나선다. 밤이 깊어 쉬어야 할 때는 오늘 나의 하루를 돌아보며 작업을 하고는 잠을 잔다.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유지하려는 게 나의 여정의 본질일 수도 있다.
지루하다는 것은 익숙함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끝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는 지표지만 동시에 한 번은 새로운 기회로 비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걸어 다니며 익숙해진 거리를 이제는 현지인처럼 느끼게 되는 것은 외지인인 나에게 그들이 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느끼며 살아가는지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초대장 같은 것이다. 비록 나 역시 그런 무뎌짐에 카메라조차 들 일은 적어지지만, 여행이란 기록만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에 그냥 온몸으로 느끼는 것에 만족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주거 단지의 각색의 건물들을 잠깐 멈춰 바라보다 갈 길을 가는 나의 모습은 서울의 거리를 걷다 궁 처마의 알록달록함을 보고는 스치며 빠져드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달 후 도시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올 나에게 울란바토르는 관광지로 비칠까 혹은 언제 가도 익숙한 서울 거리 같은 곳으로 보일까.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는 말은 틀렸다.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도 다르다. 빠르게 발달하는 이 도시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지 모르겠다. 매일 같은 풍경 속에 변화는 눈에 띄지 않지만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도시의 어딘가는 도시 중의 도시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한 달 후에도 여전히 러시아어(몽골어) 간판이 반기고, 한식집은 어느 거리에나 있으며, 사람들은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누비고 있을 것이다. 차들은 경적을 울리고 사람을 기다리기보다는 사람을 피해 다닐 것이다. 그런 거리에서 나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보다는 익숙한 북적임의 햇살을 한 꺼풀 받으며, 봄이 돼 자라나는 잎들과 함께 서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