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챠밍박 Jan 07. 2022

6. 새로운 경로를 향하여

남해군 혼행일기, 셋째 날

 늦잠을 바랐건만 새벽에 눈이 떠졌다. 아뿔싸. 휴대전화 시계는 네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막걸리의 효력은 이대로 끝나버린 걸까. 서울까지 오랜 시간 운전하려면 충분히 자 둬야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례로 전신을 이완하는 '해파리 수면법'부터 잠들기의 고전 '양 헤아리기 전법'까지 두루 시도해 보았으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꾹꾹 눌러놓았던 고민들이 머릿속 한편에서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어떻게든 잠의 입구로 달아나려 버둥대는 내가 있었다.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렇게 잠과 씨름하다 전혀 상쾌하지 않은 상태로 시계를 확인했다. 아홉시 반이었다.

    

 공용 화장실에 가서 핏발 선 동공에 들러붙은 렌즈를 떼어 버리고 양치를 했다. 막걸리에 취해 아무렇게나 잠드는 버릇은 어느덧 몸에 깊게 배었다. 내게 막걸리는 합법 프로포폴이다. 이 순백의 약물 두 통이면 나는 내시경을 앞둔 환자처럼 부지불식 잠에 빠져든다. 막걸리의 뽀얀 속살을 탐하다 일순간 기절하듯 잠드는 기분은 가히 중독적이다. 순식간에 생각이 멈추는 쾌감. 밤마다 막걸리 두 통을 마시며 나는 한때 프로포폴에 중독되어 뉴스에 오르내리던 연예인들이 느낀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가늠하기도 했다. 하여간 모든 몹쓸 것들은 왜 이리 맛이 좋을까.


 이제 카페인을 채울 차례다. 쾡한 눈으로 털보 사장님이 내려주신 모닝커피를 마셨다. 새콤한 산미 정신을 깨우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장님은 남해에 여행을 왔다 한눈에 반해 3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하셨다. 잘 되던 사업장을 정리하고 인적도 인맥도 없는 곳으로 와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고 커피 내리는 법과 가죽 공예를 배웠단다. 영화 같은 이주와 정착의 드라마를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장님은 이틀 전보다 한층 멋져 보였다. 그 용기와 결단력이 마냥 부러워졌다. 어떻게 아무런 문제 없이 굴러가는 일상을 뒤엎고 확신 없는 미래로 성큼 들어설 수 있었을까. 나였다면 과연. 아마도 고민만 거듭하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세월만 보내지 않았을까. 언젠가 알코올과 니코틴에 찌든 몸뚱이를 병상에 누이고 갈피를 잡지 못한 인생을 회상하며 한탄하는 날이 오겠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빌려 묘비명에 적겠지. 기분이 아찔해졌다.


 방에서 짐을 챙겨 나와 사장님다음에 또 보자는 아무런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당신의 새로운 경로가 쭈욱 즐겁고 순탄하길 바란다는 말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     

 


 섬이정원 초입에 이르자 무인 발권기 한 대가 나를 맞았다. 카드를 갖다 대고 5천 원을 결제하자 입장권 한 장을 뱉어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인도 손님도 없는 황량한 풍경 속에 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맥없이 졸고 있는 하얀 강아지 한 마리만이 날 본체 만 체할 뿐이었다. 원 입구엔 검표원 한 명 없었다. 입장권을 사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적막한 곳이었다.


 정원은 산책로처럼 감상 코스가 정해져 있었는데,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생각 이상으로 규모가 커 거의 작은 식물원 같은 인상을 주었다. 오롯이 개인이 만들고 가꿔 왔다는 이 정원은 방치된 느낌이 역력했다. 시들한 풀잎과 어딘가 병들어 보이는 꽃, 꺼먼 연못 색깔이 꽤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을 타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오지 정글에 파견된 탐험가 흉내를 내며 조심스레 걸었다. 미지의 식물을 발견한 생물학자처럼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사람이 나뿐이라 텅 빈 정원이 온통 내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탐험가 놀이도 금세 지루해졌다. 매가리 없는 강아지에게 장난을 걸어볼까 하다 이 적막한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차에 올라타 다랭이 마을로 출발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고등학교 친구 큰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에서 친구들과 먹고 자며 사흘인가를 지냈었다.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니 세월 참 빠르다. 불고기 버거를 먹으러 마을버스를 타고 읍내 롯데리아에 다녀온 일만 제외한다면 3일 내내 이곳에만 있었다. 남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절감한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외딴 바닷가 시골마을의 분위기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젠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던 평범한 민가들이 모조리 게스트하우스와 식당과 카페로 변신해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불법 주차된 차들이 즐비하고, 골목 구석구석은 외지인들로 붐빈다. 마음속에 간직했던 옛 마을의 정취가 속절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마음을 헛헛하게 만들 뿐이었다.   



 좁은 골목 힘겹게 빠져나와 서울로 출발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 경쾌하게 시작된 여행이 여행지를 떠남과 동시에 돌연 저물고 만다. '여행자 모드'는 일순간 꺼지고 집이 가까워 올수록 원래의 '생활인 모드'로 돌아간다. 서울로 올라가는 지리한 시간은 대게 고통스러움을 동반한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거리를 가는데 왜 목적지를 향해 갈 땐 설렘과 즐거움을, 집으로 돌아갈 땐 아쉬움과 지루함을 느끼는 걸까.


 바람 소리가 커지고 빗방울이 굵어진다.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도로의 갑갑함을 이겨내려 음악을 크게 틀고 커피와 전자담배 번갈아 빨아댔다. 


 차 안 가득 액상 담배의 희뿌연 수증기가 퍼지고, 그 너머로 남해에서의 날들이 하나 둘 스쳤다. 털보 사장님이 손수 깎아주신 주황색 감, 매일 밤 마신 뽀얀 막걸리 두 통, 프라이팬에 볶아지던 커피콩의 고소한 냄새, 바다를 온통 물들이며 저물던 상주 해변의 붉은 해 따위가. 그런 소소한 것들이. 여행을 떠날 때면 내심 거대한 드라마를 기대하곤 한다. 일상에서 쉽게 벌어지지 않는 특별한 경험과 마주하기를. 이를테면 낯선 이성과의 운명적인 마주침, 하룻밤 술자리로 다져진 호형호제의 관계, 지는 노을을 바라보다 문득 얻는 찰나의 깨달음 같은 것들을.

 

 며칠의 여행으로 뿌리 깊은 고민이 정리되거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하는 등의 거창한 일이 일어나리라 기대하는 . 그게 어리석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금 재확인한다. 영화나 소설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해결의 내러티브는 없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진 흥미로운 기승전결, 음악적 리듬, 장대한 대단원의 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인공 캐릭터부터 밋밋하지 않은가. 나는 열망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인공이 아니라 '행인 1' 같은 단역에 가까웠다. '행인 1'의 드라마에선 그 어떤 일도 벌어지거나 해결되거나 나아지지 않는다. 여행이란 단어가 주는 낭만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자주 밋밋하고 실망스러울 정도로 별 없는 살을 보여주곤 한다. 그래, 이번 여행은 숨 고르기일 뿐이다. 견디기 힘든 일상을 피해 좀 더 나아 보이는 곳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묻어두었던 문제들이 좀비처럼 되살아나 나를 향해 달려들겠지. 리고 또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겠지. 는 함께일 때 혼자를 꿈꾸고 혼자 때 소속갈구한다. 여행을 떠나면 집이 그립고 집에 돌아오면 달아날 궁리를 한다. 나는 어디에도 마음 둘 수 없는 방랑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운전만 일곱 시간은 한 것 같다. 휴게소 딱 한 번 들렀으니 집에 도착할 무렵 내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도착을 두어 시간 남긴 경기도 어귀에서, 내비는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국도 날 몰아넣으며 뺑뺑이를 돌렸다. 과연 이 길이 맞나 싶은 의구심에 휩싸여 불안과 짜증을 반복해야 했다. 자꾸만 새로운 경로로 안내하겠다며 명랑한 목소리로 안내를 번복하는 이 여인네는 소시오패스일지도 모른다. 어딘지도 모르는 막히는 도로에서 끝 모를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것. 잠시 후 계속 직진을 할지 우회전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것. 내비의 주문대로 경로를 벗어났는데 30분 후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것. 자욱한 담배 연기 때문이었을까, 문득 이것이  인생길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제대로 된 새로운 경로를 안내받길 원한다. 목적지가 훤히 들여다 보이고 막힘이 없는 어떤 투명한 경로를. 인생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잠시 기대고 싶은 순간이다.   


 어느덧 완벽한 생활인으로 회귀한 나는 깊은 밤 익숙하고 반갑고 갑갑한 집으로 귀가했다. 매일 밤 써내려 간 일기를 토대로 여행기를 쓰려고 한다. 우선 달콤한 막걸리부터 두 통 마셔야겠다. 기억을 잃고 쓰러져 잠을 자야겠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나는 꿈을 꿔야겠다. 외딴곳에서 털보 사장님처럼 새로운 경로를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친다면 짜릿한 꿈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5. 플랜 B가 있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