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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밍박 Dec 17. 2021

5. 플랜 B가 있습니까

남해군 혼행일기, 둘째 날

 드디어 찾았다, 그 집을.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었다. 온통 컴컴한 마을에 그 집만이 유일하게 따스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 진짜 고생했어요. 아니 내비는 가라고 하는데 골목엔 진입금지라고 써져있고,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린데 한참 헤맸네요."


나는 여사장님께 이곳에 오느라 얼마나 뺑이를 쳐야 했는지에 대해 투덜대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신기한 식당에 엉뚱한 메뉴들이 가득했다. 스파게티가 있는가 하면 짜장면이 있고, 인도식 커리가 있는가 하면 터키식 볶음밥에 참조기 백반까지 있었다. 각국의 음식들이 무질서하게 혼재된 것이 이 집의 특징이자 매력인가 보다. 내가 주문한 이태리식 칠리 새우는 맛이 좋았다. 이마저도 이태리 스타일이라기 보단 이태리식과 한식을 절묘하게 짬뽕한 퓨전 요리 같은 인상을 주었다(사실 이태리식이 뭔지 잘 모른다).


 식사시간을 훌쩍 넘긴 밤, 나는 문을 연 식당을 검색해 암흑 같은 남해군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전방에서 우회전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듣고 핸들을 틀었을 때, 언뜻 보기에도 어둑하고 비좁은 골목 입구가 날 막아섰다. 너무 가파른 내리막이라 꼭 낭떠러지 위에 차를 대고 선 기분이었다.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내리막 초입부터 둥그스름하게 꺾이면서 점점 좁아지는 모양새가 영 불안했다. 저런 곳에 잘못 들어갔다간 자칫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꼼짝없이 차 안에서 밤을 지새야 할지 모른다. 이 골목으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얼마 안 가 식당이 나타날 텐데. 


망설이다 다시 차에 올라탄 나는 카카오 지도를 열어 식당까지 가는 경로를 확인했다. 몇 분만 더 가면 오른쪽으로 또 다른 골목이 나오고, 그 길을 따라 가면 식당 앞에 도착할 수 있어 보였다. 바퀴를 원위치로 돌려 도로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둡고 비좁은 골목뿐이었다. 게다가 골목 초입 담벼락엔 '진입금지' 푯말까지 떡하니 붙어있는 게 아닌가. 티맵 아가씨는 계속 우회전을 재촉하고, 푯말은 아니 된다며 나를 막아서자 이쯤에서 나는 고민이 들었다. 어떻게든 목적지로 가야 할지, 새로운 식당을 찾아야 할지. 식당까지 남은 거리는 고작 백 미터 남짓이었다. 도로에 차를 세우고 그냥 걸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런 암흑 같은 편도 1차로의 도로에 불법주차를 했다간 누군가 내 차를 들이박고 비명횡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당을 검색하며 시간을 허비하다 결국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을 설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어떻게든 목적한 식당으로 가리라 다짐했다. 지도를 다시 보니 다행히 전방에 골목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길만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설마 도착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신비 식당은 아니리라. 좀 더 직진하자 드디어 오른쪽으로 이전보다 더 밝고 폭이 넓은 골목길을 만날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조심조심 내려가자 커다란 공터 주차장이 나왔고, 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걸어가자 사막 위 오아시스와도 같은 그 집이 나타났다. 신비하고 엉뚱하고 따스한 그 집이.



 가끔 내가 목적한 곳에 도착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고 싶은데, 발버둥은 치고 있는데, 대체 이 길이 맞는 건지 저 길이 맞는 건지, 애초에 내가 목적지를 잘못 설정한 것은 아닌지 하는. 스물아홉 겨울의 내 상황이 딱 그러했다.


내 꿈은 거창하게도 영화감독이었다. 영화를 찍겠다고 주변에 큰 소리를 쳐댄지 몇 년이나 흘렀지만 나는 딱히 뚜렷한 결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몇 편의 독립영화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했고, 시나리오를 쓴답시고 몇 달을 방구석에 처박히기도 했으나 감독의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단편영화가 잘 되면, 그러니까 영화제에서 수상도 하고 업계에 소문도 나면, 유명한 감독들과 연결되어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러다 입봉작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데뷔작을 찍고,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 차기작을 준비하고... 그런 무탈하고 행복한 줄거리를 머릿속에 그리며 살던 시기였다. 해피앤딩을 위해선 무엇보다 단편을 잘 찍는 게 우선이었다. 힘을 모으고 모아 기똥찬 단편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리라 의지를 불태웠다. 불가능에 가까운 바늘구멍 같은 일이었음에도 진지하게 빠져드는 나를 보며 부모는 애간장을 태웠다. 고지식한 나의 아빠는 자식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있는데 말리지도 않느냐며, 아들놈이 나를 닮았다면 예술적 감수성 따위 있을 리 없지 않냐고 엄마를 나무랐다(고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부모는 아들이 안정된 직장에 하루빨리 취직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굳이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겠다는, 부모 눈에는 한참이나 부족해 보이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나 역시 그런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꿈에 지지와 응원을 던지는 이들에게 기댔다. 네가 찍은 영화를 꼭 보고 싶다고, 너는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십 대 초반 가정용 캠코더로 찍은, 내가 영화라 우기는 조악한 영상물을 보며 "박 감독 작품 잘 봤어!", "주제에 공감이 가더라." 따위의 말을 건네는 이들에게.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나를 추켜세우던 이들의 작은 말과 행동을 고이 접어 수집하고 확신이 서지 않을 때면 꺼내 보았다.


 스물아홉 겨울, 나는 죽을 둥 살 둥 무려 30분에 이르는 단편 아닌 단편을 만들어 냈다. 방구석에서 가편집을 하며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상상을 했다. 10분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장탄식을 뱉어댔다. 생 돈 천만 원이 넘게 들어갔다. 어찌어찌 편집을 마친 나는 지원한 모든 영화제에서 탈락했다. 이듬해 조그만 회사에 취직했다.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뀐 첫 해였다.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꿈과 돈은 허상처럼 사라지고 아무런 결과지도 받아 들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힘에 부쳤다.  


돌이켜보면 내 앞에는 진입금지 푯말을 세운 무수한 골목들이 있었다. 푯말들은 하나같이 이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좁고 어두운 험로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영화로 밥 벌어먹고 살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니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말들을 흔하게 들었다. "나는 무명씨가 그냥 웬만한 곳에 취직이나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리던 그 형님의 말씀을, "넌 어떻게 보면 공무원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라는 선배의 비아냥을, 내 영화를 보며 애써 말을 아끼던 그 친구의 애매했던 표정을, 무엇보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하던 나 자신의 의구심을, 좀 더 귀담아 보고 듣고 생각했어야 했다.


나는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했다. 허접한 단편 한 편 찍고 풀썩 나가떨어졌다. 내가 백기를 흔들며 포기를 선언하자 누군가는 비난했다. 날 응원하던 이들이었다. 아름다운 꿈을 왜 포기하려 드느냐고, 이제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냐고 나를 타박했다. 이제까지의 진심과 열정은 다 어디로 갔냐고, 원래 사람이 포기하는 시점은 목적지를 코앞에 둔 때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확신 없이 말하는 이들의 눈동자에 내 초췌한 몰골이 비쳤다. 그런 내가 싫었다. 하, 이들은 혹시 날 대리만족의 도구로 삼아왔던 걸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하여간 여러모로 무너진 내게 이들이 꿈을 닦달해대자 내 정신은 더욱 혼미해져 갔다. 나는 무일푼에 무능력자에 무기력자가 되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오후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어야 했다.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 이러다 감독은커녕 평범한 직업인조차 되지 못하고 뒷골목 부랑자로 살게 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우리 집은 나를 포함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도생의 길을 가야만 하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 아닌가. 나이 서른, 이제 기대고 부빌 곳은 없었다. 늦었지만, 많이 늦었지만 플랜 B를 생각해야 했다.   


현타가 왔다. 멘붕도 왔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플랜 A로 가는 길이 장애물로 가득했음에도 나는 대책이 없었다. 미련한 나는 그랬다. 플랜 B를 만들면 플랜 A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고, 플랜 B를 만든다는 건 플랜 A에 대한 의지박약의 증명이라고, 오로지 플랜 A만을 간절히 염원해도 이루어질까 말까 하므로 나는 순교자의 자세로 오직 플랜 A만을 바라보겠다고. 그런 나를 보며 아빠는 가슴을 쳤고, 그렇게 나는 삐걱대는 1톤 트럭을 몰고 경운기 한 대 겨우 지나갈 어두운 미로 속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토익 점수도, 자격증도, 어학연수도, 교외활동도, 누구라도 있을 법한 그 어떤 자그마한 스펙 조차도. 플랜 A 바보의 최후였다. 취업 준비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나이 서른의 똥멍청이가 거기 있었다. 취업시장에서 내가 가진 거라곤 버리지 못한 예술가의 일그러진 자의식뿐이었다.


어찌어찌 나는 평범한 8년 차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동안 열패감을 떨치지 못해 자주 넋 나간 표정을 지어야 했다. 고백하자면, 몇 해 전까지도 이루지 못한 플랜 A가 생각날 때면 공허하고 혼돈스러운 상태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말하고 싶다. 기약 없는 미로를 돌고 돌아 목적지로 전진하는 이에게. 그것은 용기인가 만용인가. 아무래도 좋다. 적어도 플랜 B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니, 그전에 묻고 싶다. 그 길을 통과해 가려는 곳이 진정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가 확실한지. 맞다면, 그곳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샅샅이 파악하고, 자신이 끝까지 갈 용기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 아니, 다 부질없다. 꿈이란 덫에 걸리면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게 자칭 예술가들의 숙명이니까. 


이탈리안 쉬림프는 신비한 맛이 있다. 맛있었다는 뜻이다. 맛이란 건 음식 자체만의 것이 아니다. 그날의 기분, 내 감정, 내 상황 같은 것들이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둘러 둘러 도착한 그 집에서 먹은 한 끼 식사에는 어떤 감격이 있었다. 내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이, 어둡고 비좁은 골목에서 길을 잃거나 갇히지 않고 당도할 수 있었음이, 그 안도가 주는 맛이 있었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이들을 응원한다. 동시에 염려한다. 세상에는 나와 당신들을 속이는 비겁한 말들이 많다. 꿈에 대한 명언을 들먹이며 현실을 왜곡하는 협잡꾼들의 달콤한 목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꿈을 먹고 살 게 아니라 밥을 먹고살아야 한다. 밥 안 먹으면 죽는다. 밥을 먹어야 꿈도 꾼다. 답 없는 미로 속을 뱅글뱅글 돌다 정신까지 돌아버리지 말길, 깨지고 부서져도 정신줄 놓지 말길, 마침내 따스하게 불을 밝힌 그곳에 당도하길 바란다. 그 맛은 얼마나 좋은 맛일까, 내가 맛보지 못한 그 맛은. 플랜 B를 잊지 말라고 꼭 덧붙인다. 결국엔 꿈이 아니라 밥을 먹어야 산다는 걸, 살아야 꿈도 꿀 수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어느덧 현실주의자가 된 나는 덧붙이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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