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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규 Jun 13. 2022

낭만(浪漫)

“나 다음 주부터 제주도 한 달 살기 한다, 놀러 와라.” 몇 달간 정적이 흘렀던 단톡방에서 울린 간만의 알림이었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가 좋으냐 물었고, 그렇게 전등을 켠 것처럼 번뜩, 하고 무채색 일상에 색깔이 칠해졌다.     


 종강하자마자 제주도로 날랐다. 숙소 값은 걱정이 없었기에 값싼 비행기 표를 구해 늦은  도착했고, 간단한 주전부리와 함께 그간의 근황을 나눴다. 그새 제주살이에 익숙해진 집주인의 얼굴에선 근심도 걱정도 찾아볼  없었다. 속으로 ‘누구보다 조급함이 많았던 놈이.’ 하며 미지근한 맥주를 들이켰다.     


 3박 4일을 3분 4초처럼 보냈다. 크기가 원룸만한 지하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거친 파도 위에서 서핑도 했다. 가진 한계를 극복해보자며 한라산도 올랐다. (나의 한계를 아주 잘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즐거웠다. 시간을 보내는 그 자체가, 그러니까 제주에서의 모든 것이 즐거웠다. 눈 깜짝할 새 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우린 육지로 돌아왔다. 잠시 켜졌던 전등은 다시 소리 없이 빛을 잃었다.    

  

 회색빛 짙은 현대 사회에서 낭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앞만 보며 달리기 바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그들의 발걸음은 쉴 기색이 없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꼭 절망 속에 사는 것만 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맞는 건지, 시기를 놓치지 않고 내 위치에서 적당한 직장을 구하는 게 맞는 건지. 꿈이 있는 건 낭만적인 건지, 아직 철이 덜 든 건지. 나도 모르게 생각하는 법을 까먹는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시선, 사회에 맞춰진 여러 가지 압박감 등 나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에 둘러싸여 어느새 내 기준도 그곳에 맞춰져 있다.


 뭐가 맞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긴 고민 끝에 내리는 결론은 언제나 나를 더 믿어보자는 것이다. 앞만 보며 걷기보단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때론 잠시 멈춰 오늘의 바람과 계절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한 삶 속에서도 사랑하는 낭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서.

 땅 위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푹신한 침대 위가 아니어도,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겉치레는 겉치레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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