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또 다른 이별
딸아이가 독일 베젤(Wesel)이라는 곳으로 근무지가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올여름 6-7월에 이사를 간다고 한다. 캐나다 퀘벡이란 곳에서 내가 살고 있는 BC주 빅토리아로 근무지가 바뀌어 이사를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코로나19 때문에 가까이 있지만 생각처럼 자주 보지 못했는데 그새 또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니 어미의 마음은 뒤죽박죽이다. 유럽의 코로나19 상황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고 나토(NATO)로 가는 딸아이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 좀 더 좋은 세상 그리고 좋은 타이밍에 가게 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염려가 있지만 세상일이란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외국으로 간다고 해서 서운할 것도 없다. 국토면적이 한국의 100배(정확히는 99.8배) 가까이 큰 캐나다라는 나라는 말이 국내지 사실 동부와 서부에 뚝 떨어져 살면 다른 나라에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 그냥 캐나다라는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정서적인 안정과 위안으로 마음의 거리가 가까울 뿐이지 물리적 거리는 외국에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잘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아이들인데 캐나다 국내에 있든 외국에 나가 있든 무슨 차이가 있으랴!
딸아이와의 또 다른 이별을 앞두고 나는 위안거리들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중 하나가 앞으로 딸아이를 방문하게 되면 독일만이 아니라 인접한 유럽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요량이다. 그 계획의 첫 번째 단추를 독일어 배우기로 시작했다. 몇 년 전 퀘벡에 있는 딸아이를 방문했을 때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나는 딸아이가 옆에 없으면 엄마 잃은 아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어의 힘이란 참 대단한 것이다. 하루 아침에 딸아이가 나의 엄마가 되고 내가 딸아이의 딸이 된 뭐 그런 기분이랄까... 몬트리올 만 해도 영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딸아이가 있었던 곳은 퀘벡 외곽지역으로 불어를 하지 못하면 간단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동양인인 딸아이와 내가 걸어가면 여기저기서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지천이었던 그런 곳이었다. 도움을 주려고 딸아이를 방문했던 내 계획과는 달리 내가 머무는 내내 언어가 자유롭지 못한 엄마를 배려해야 하는 딸아이에게 불편한 짐이 되고야 말았다.
딸아이는 듀오링고(duolingo)라는 무료 프로그램으로 아침마다 10분씩 독일어 공부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나도 내친김에 그 프로그램에 등록을 했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했기 때문에 내겐 독일어가 아주 낯설지는 않다. 물론 그때 배웠던 내용들을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듀오링고는 내가 여행을 목적으로 배운다고 선택하자 여행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표현부터 시작했다. 커피와 물을 주문할 수 있도록 "커피와 물 주세요(Kaffee und Wasser bitte)" 등으로 시작한 듀오링고 5분은 아주 재미나게 훌딱 지나갔다. 고등학교 때 독일어 수업은 문법부터 시작했는데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표현과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는 듀오링고는 날마다 짧게 지속적으로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나는 딱 하루 그렇게 시작하고 그다음 날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셋째 날은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넘어갔다. 내 이메일에 오분만 공부하라고 듀오링고 리마인더(reminder)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 날마다 오분만 투자하자!
나는 독일어 공부를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동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속으로 딸아이와 경쟁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어가 모국어인 딸아이를 영어로 이길 수는 없고 불어도 이미 바이링궐(Bilingual: 모국어 수준임) 단계에 있는 딸아이를 불어에 전무한 내가 이제 시작해서 이겨낼 방법도 없다. 그러나 독일어는 내가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는 독일어가 전무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고 나는 아무리 기억이 없다고 해도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어디 가겠냐 싶기도 했다. 지금부터라도 지속적으로 배우고 익히면 딸내미를 능가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물론 그 나라말을 사용하는 그 나라안에서 독일어를 익히는 딸과 듀오링고를 통해서 배워가는 내가 비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은 배우려고만 하면 필요한 자료들이 인터넷에 넘치고 넘치는 세상이 아니던가!
뭘 배우는 데 있어서 집중력과 끈기가 뛰어난 딸아이를 앞서기란 어지간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도전해 보련다. 내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딸아이가 나를 위해 다 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내 일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딸아이가 낮에 일을 하더라도 집에서 기다리는 엄마를 걱정하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듀오링고로 시작한 내 독일어 공부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갈지 나도 모른다. 그러나 딸아이를 향한 내 큰 사랑만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히 리베 디히(Ich liebe dich: 사랑한다)"로 시작하는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들으며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