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그 꿈을 이룬 자.
퇴직은 입행 첫날부터 간절한 바람이었으면서도 엄청 먼 미래의 일이었다. 투덜이 스머프처럼 늘 힘들다고 툴툴대던 나는, 실상 일을 좋아했다. 은행이 좋았다.
적성에도 잘 맞았고, (조금은 꼰대스러우면서) 보수적이고 정직한 조직문화 역시 잘 맞았다.
내가 상담한 고객이 지점에 중요한 VVIP가 된다거나, 어려운 섭외를 쉽게 해냈을 때의 쾌감 같은 것들은 힘든 와중에 큰 보람이었다. 은행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실적과 인간관계, 단골고객이든 낯선 고객이든 진심으로 처리해드리다 보면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실적은 자연스럽게 채워졌다.
8개의 지점을 거쳤다. 가끔은 "공공의 적" 수준의 직원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전우애의 정을 나누며 친구보다 친구같이 지냈다. 퇴사하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고객 출신 친구들도 있다. 은행은 사람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지만 또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직장이었다. (모든 은행이 다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일과 사람을 견디며, 투덜대다 위로받고 그러면서 그렇게 천년만년 다닐 줄 알았다. 어리숙한 촌뜨기였던 나한테 일과 인생을 가르쳐주신 멋진 선배님들처럼 나도 성숙한 어른(꼰대)이 되어 정년에 멋지게 퇴직하는 게 조직 안에서 꿈이라면 꿈이었다.
언제 어떤 명분으로 퇴직할지 나조차도 궁금했는데, 직장에 대한 애착이 애환을 넘어 애증으로 바뀌어 가는 걸 알았다. 하루를 살아내는 게 아니라 그저 버텨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제 더는 이 일이 행복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은행의 합병은 내 미래를 바꾸어 놓았다. 은행과 은행이 합해졌을 뿐인데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마음이 통하는 동료들끼리 서로 존버하자며 격려를 주고받는 날들이 늘어갔다. 존버하자던 그들도 더러는 떠나갔다.
방황했다. 나는 내가 이상주의자였다는 것도 점점 깨달아갔다. 내 이상이 깨졌다.
드라마, 미생의 대사 중 하나
“신념이 어딨냐! 까라면 까는 거!”
나는 신념이 있었나 보다. 까라면 까는 건 못하겠어서 나왔다. 낙오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탈출이었다. 연차가 많이 쌓인 사람일수록 퇴직은 큰 고민이고 결정이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 청춘, 내 미래, 소중한 인연들, 지난 추억과 멈추는 내 꿈. 그리고 무엇보다 연봉.
어쨌든 세상에 나오고 보니까, 그때의 내가 나인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직장이었고, 유일한 직장이었던 그 세상 밖에서 나는 또 다른 나였고, 나를 잘 몰랐다는 걸 알게 되었다.
퇴직 덕분에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다.
나를 찾는 시간들이 좋다.
퇴직하지 않았으면 못 만났을 지금의 나.
지금 내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