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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썽 Aug 04. 2023

족쇄와 글쓰기

자기만의 방에서 적는 글

7월부터 9월까지 문학관의 창작공간의 이용자격이 생겼다.

정원 8명이 벽과 파티션으로 나누어진 공간, 지정석을 휴관일(월요일)을 제외하고 주 6일, 9 to 6 시간 중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공간 신청을 할 때 내가 상상했던 나의 루틴은 이런 식이다.

아침 일찍 동네를 걷고, 간단히 집안 정리정돈을 한 후에, 집을 나선다. 상쾌한 발걸음으로 버스를 타고, 카페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모닝커피를 산다.

우아하고 정중하게 문학관 직원분들께 인사를 하고 출석체크를 한 후에 나는 전업작가 입네 하는 마음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꽉 채워서 정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지 그리고 보람찬 마음으로 걸어서 귀가한다는 야심 찬 포부 같은 걸 세웠으나, 두 개의 마음은 여기서 또 등장한다. 신청만 해놓고 가다 말다 하거나, 혼자 낯가리고 예민 떨다 어물쩍 그냥 이도저도 아니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생각이 많으면 될 일도 안된다고 했다. 뭘 써야겠다는 주제도 기획도 없이 일단 신청해 버린 거다.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는 방식으로 삶의 태도를 바꿔보자.


신청하고 보니, 최소 출석요구 일수라는 규정이 있다. 최소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자동 탈락이다. 차순위 신청자에게 기회가 돌아간다고 했다.

백수 생활 7년 만에 고정적으로 가야 하는 장소가 생긴 터라 동선이 익숙하지 않고, 또한 뚜벅이가 매일 출석하기에는 너무 잦은 비와 습도 높은 무더위가 발목을 잡았다.

7월은 날씨 핑계와 여름휴가로 여러 날 이탈했고, 겨우 출석일수를 채웠다.

그런데 8월이 되고 보니, 7월의 무더위는 비교가 되지 않는 땡볕이다.  어차피 한여름인 이상 더위는 피할 수 없을 걸 예상했지만 뚜벅이는 웁니다다.

빠질 때 빠지더라도 특별한 용건이 없는 날은 일단 출석하는 걸로 출석목표를 강화했다. 다만 문학관에서 집까지 걸어서 돌아가겠다는 운동목표는 자체 포기했다.

더워도 아니 뜨거워도 너무 뜨겁다. 9월에는 집까지 걸어가는 게 가능할까. 여하튼 엄청난 무더위 속 출석은 남편 찬스로 이어가고 있다.



신청 당시에 마음먹어본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쓰기는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을 지구력이 부족하고, (아 지구력,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초등학 아니 국민학교 때 지구력이란 단어를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오래 버티는 힘이라고 설명은 해주셨는데 오래 버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을 때라 지구력을 기르라는 선생님 말씀에 물구나무를 서서 지구를 거꾸로 들면 지구력이 커지나 철봉에 오래 버티고 매달려 있으면 지구력이 길러지나 그런 그지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살다 보니 내 손으로 지구력이라는 말을 쓰는 날이 왔다는 게 뭔가 묘하다) 문학관 밖에 없는 큰 도로 옆이라 점심 해결이 애매하다는 핑계로 오전이나 오후 반나절만 이용하고 있다.

지구력도 없고, 의지도 박약한 내가 출석일수 조항이 없었다면, 흐지부지 됐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출석일수라는 족쇄가 매우 맘에 든다.


하루에 두, 세 시간이라도 집중하고 뭘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나를 계속 쓰게 한다는 게 놀랍다.

7월 한 달 동안, 실물책으로 만들고 싶었던 <나는 지금의 내가 진짜 좋다>는 브런치북으로 엮었고, <내가 그린 기린 그림 1 제주 편>을 썼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2 김제편>을 이어 쓰고 있다.  이 글은 <평범한 삶에 글쓰기> 8번째 이야기로 발행될 예정이다.

실물책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 것 같다. 물성을 가진 책도 좋지만, 지금처럼 온라인에 싸는 글똥으로도 성취감이 적립되는 중이다.


이래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거였구나. 집에서는 쓸 수 없는 글들이 문학관에 오면 써진다.

이름이 가진 힘일까. 문학관.  적당한 자동차 소음과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 밖에 할 게 없는 공간 덕분일까.

결론적으로, 문학관 신청하길 잘했다.

시간이 지나도 나에겐 부끄러울 글인지만,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40대를 돌아보면 나 그때 이런 것도 했네 하는 기록물의 하나로 남을 ‘뭐’가 있다는 게 좀 괜찮은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리다면 엄마로서 내 역할이 있겠지만, 이제 아이들도 많이 자랐고, 그 나이 때 나보다 훨씬 잘 자라 있어서, 내가 해 줄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나 이렇게 놀아도 되나와 7년 동안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했네 그런 생각이 깊어지지만,

확실한 건 내가 원하는 건 대단히 대단한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적당한 잉여 인간으로 살되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생각이다.

난 지금이 딱 좋긴 하다.

매일 걷고, 매일 떠들고, 매일 뭘 (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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