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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맘 Jun 18. 2024

감자껍질에 관한 고찰

그래서 제가 감자를 좋아하는 거에요.


아빠가 감자 한 상자를 주셨다. 채를 썰어서 볶아도 먹고 감잣국도 할 수도 있지만 이 더운 여름에 냄비 앞에 서 있긴 싫다. 좋았어! 결정을 내렸다.

깨끗이 씻어 큰 냄비에 넣고 껍질째 졌다. 얼마나 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가스레인지 앞을 지날 때마다 오며 가며 젓가락으로 푹푹 한 번씩 찔러본다.

10분이 지났는데 젓가락이 1센티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진득하게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딸과 특급과외를 하다가 아차차! 생각이 나서 열어보니 휴, 다행히 타진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한강 물에 동동 뜰만큼 물을 많이 부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시냇물 정도의 물에 감자가 잠겨 잘 익어 있었다. 그런데 껍질이 자기들 스스로 반쯤 벗어 놓고 벌어져서 중간중간 속살을 보여줬다.

 오히려 좋아, 내가 마저 다 벗겨줄게!

딱 드는 생각이 이 많은 껍질을 언제 다 까지? 지금은 뜨거워서 손도 못 대고 지문이 다 없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음날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그대로 둔 채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감자는 잘 식어 있었고 다시 미뤄뒀던 고민이 시작되었다.

껍질을 어떻게 다 까지? 고구마 껍질은 먹어봤는데 감자껍질은 먹을 수 있나? 감자의 싹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혹시나 설마 해서 감자껍질이라고 검색을 해봤다.

그런데 연관검색어로 뜬 게 바로바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란 책이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책이다. 예전 독서 모임을 할 때 <7년의 밤> 다음으로 같이 읽은 책이고 아직도 나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처음엔 책 제목이 나의 이목을 확 잡아당겼지만, 감자껍질 파이라고? 사과껍질 파이도 먹기 힘들 거 같은데…, 호기심 반, 과연 재미있을까 불안함 반이었다.    

 


건지는 영국해협의 섬 이름이다.

감자껍질 파이는 독서 모임에서 먹은 음식이다.

북클럽은 등장인물들이 모여서 독서 모임을 한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 건지 섬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군에게 점령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몰래 만찬을 하다 들켜서 독서 모임으로 탈바꿈하고 각자 원하는 책을 읽은 후 감상을 발표하는 식으로 만남을 이어 나간다. 이 책의 주인공인 줄리엣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건지 섬에 들어가 취재를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롭게 펼쳐진다. 편지글의 형식이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바탕에 깔려있지만, 그 클럽 멤버들의 이야기가 잔잔한 듯 하면서도 뜻밖에 밑줄을 긋게 되는 문장들이 많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건지 사람들은 전쟁 중에도 결코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영화로도 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봤으나 책으로 보는 게 감동이 있고 독서라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 힘이 있는지를 알게 해 준 소설이었다.     


감자껍질로 시작된 나의 회상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감자에 집중한다. 쉽게 가자고 결정했다. 싹이 나지 않은 감자껍질은 먹어도 괜찮고, 건지 사람들도 파이로도 해 먹었으니 나도 먹고 우리 가족도 먹이기로 했다.

이름하여 감자 무스!

감자에 유통기한이 거의 임박한 생크림, 스테비아 설탕, 레몬즙, 그리고 마요네즈를 대신한 건강에 좋은 수제 요거트를 붓고 나의 요술 방방이- 도깨비방망이로 드륵 드륵 갈았다. 감자의 전분이 찰기를 더해줘서 꼭 김치 담글 때 풀을 쑤는 것 같은 질감으로 바뀌었다. 부족한 수분은 흰우유로 보충해 준다.

좋아, 좋아,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어!


이 감자 무스는 활용도 만점이다. 그냥 스푼으로 떠먹을 수도 있고 오이피클을 쫑쫑 썰어 섞어서 식빵 사이에 발라 감자 샌드위치로 먹을 수도 있다. 공모양으로 빵가루에 굴려 튀기면 감자고로케가 되고 레스토랑 같은 데서 스테이크 먹을 때 한 스쿱 올려놔 고기와 함께 곁들여 먹기도 한다. 무스를 만들 때 비싼 버터를 녹여 섞으면 훨씬 더 부드럽고 고급진 맛이 난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생크림도 동물성 생크림을 꼭 쓰길 강조한다.      


나는 이렇게 출근 준비하기에도 바쁜 이 시간에 도깨비 방망이질까지 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집을 나왔다. 휴~ 뿌듯하다.

지금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감자 무스로 새하얘져 있다.

퇴근 후 집에 가서 나는 이렇게 먹을 것이다. 통밀 식빵 위에 감자 무스를 올려서 감자 무스케이크를 만들기로 상상을 해본다. 상상 속에서는 근사한데 잘 될까 싶지 않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에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22쪽          


(감자무스케이크 사진은 성공하면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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