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단 내에서 잦은 빈도로 보이는 한 가지 특성을 전체로 일반화하는 건 틀린 일이지만, 내가 아는 한 대구 사람들은 낯간지러운 상황에 다소 면역이 없다. 이 성급한 일반화의 표본이 된 것은 대구에서 나고 자란 양 모 씨 (남, 곧 예순이 될 예정. 무뚝뚝함을 사람으로 만들었더니 그가 되었다!)와 박 모 씨 (여, 역시 예순 바라보는 중. 피아노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그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대변한다)인데 그 둘의 직계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사이에 태어난 자식인 나는 뭐 말할 것도 없다.
어떤 관계에서든 적당한 온도 유지는 필수. 간질간질한고 뜨뜻한 것, 뱉고 나면 뒷목 가려운 문장 같은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할머니 기일이랍시고 엄마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문자로 할까 그걸 썼다 고쳤다 지우는 짓을 온종일 했다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점심시간엔 동기들에게 상담까지 받았다. 다정한 딸 노릇이 이렇게나 어렵다니. 구구절절한 문장 몇 개는 덜고 주말에 맛있는 거나 먹자며 혼자 쓸쓸해말라는 말을 남겼다. 전송 버튼 누르자마자 깨닫는다. 아 방금 카톡은 가족 구성원 내 암암리에 정해진 '낯간지러워 한계령'을 넘고 말았군. 과연 박 권사는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톡은 너무 엄마 다웠다. 그래~ 알겠다. 덜 딱딱해 보이려고 나름 물결이나마 붙인 게 뻔하다.
독립 후 처음 맞는 할머니 기일은 마음이 배로 쓰였다. 물론 같이 살면서 뭐 얼마나 대단한 말을 했겠냐만은, 같이 저녁 먹으면서 '어.. 할머니 기일 곧이네.', '응 그렇지.' 하는 게 전부인 대화라도 없는 것보단 나은 것이다. 미성년자 땐 그랬다. 부모님과 어른 대 어른으로 얘기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세상 풍파 이겨나가는 드라마 주인공들이 되게 멋져 보이는 거다. 나도 저런 어른이 돼야지. 지금은 내가 고딩이라 엄마 아빠도 날 철 모르는 애처럼 보지만 스무 살이 되면 달라질 거라고! 현실은 집 싱크대 청소했다고 가족 톡방에 자랑하면 이제 철드냐며 키읔을 두 개나 덧붙여서 비웃음을 받는 수준이다. 이런 처지에 그럴듯한 위로나 다정의 말이 나올 수 있을 리가. 내가 날 봐도 참 멋없고 철없는 삼십대다.
예상된 죽음이란 게 있을까. 외할머니는 정말이지 갑자기 돌아가셨다. 대구에서 오랜만에 안산으로 놀러 올라오시던 길. 도착하고 하루도 안되어 원인 모를 통증으로 입원을 하셨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았을 그날.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유난히 산만했다. 오전에 있던 뉴스 때문이었다. 쌤, 뉴스 보셨어요? 제주 가던 배 거기 단원고 타고 있거든요. 근데 거기 저희 중학교 친구들이랑 아는 쌤도 있는데, 별 일 없겠죠? 적당한 안타까움을 섞은 긍정의 답은 무신경했다. 그때 연락이 왔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엄마 먼저 대구 가있을게. 아빠랑 준비해서 내일 와.
대구에 마련된 장례식장의 복도엔 불이 나가 있었다. 관리인이 일부러 꺼뒀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중앙에 놓인 휴게실 티브이와 자판기가 그나마의 빛이었지만 뉴스에서 나오는 얘긴 그것관 거리가 멀었다. 묵묵히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엄마는 괜찮아 보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지나갔다. 한 가지 달랐던 건 거실의 티브이. 거기엔 매일같이 뉴스만 켜져 있었다. 하루 종일 그것만 보고 있길래, 그만 보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우야노, 쟤네라도 살아야 하는데.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니 대꾸하지 못한 게 잘못은 아닐 거다. 그런데도 그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뱉지 못한 미완성의 문장은 아직 가시처럼 걸려있다. 엄마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구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 그해 봄은 유난스러운 비가 자주 내렸다.
포털에 세월호 희생자 6주기를 애도하는 배너가 걸렸다. 6이라는 숫자가 새삼스럽다. 시간은 의식하지 않은 틈으로 빠르게 내달린다. 지금보다 더 커다란 숫자가 애도 앞에 붙으면 우리의 감정은 얼마나 더 흐려질까. 어쩌면 느슨해진 사이로 우리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래서 무엇을 약속했는지가 함께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번쯤은 촘촘하게 끈을 잡아당겨볼 일이다. 엄마에게 연락을 하고 정리되지 않고 흩어져있던 그날의 조각들을 모아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 나의 지극히 사적인 기억에 약속을 더해본다. 평생 함께 기억하고 살아내기로.
그리고 내년에는 엄마에게 오늘보다 조금은 더 다정한 말을 건네겠다는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약속도 추가해 봤는데 말입니다. 벌써부터 식은땀이 나고 척추가 근질근질거리지만 내년 일은 내년에 생각하기로 한다. 서투른 마음을 눌러 담아 카톡을 더 보냈다. 엄마 내년엔 추도예배도 따로 드리자. 더 잘 기억하고 더 잘 그리워할 수 있게. 엄마의 대답 뒤 붙은 물결이 넘실거린다. 그 위로 떠오를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빛나는 것이길. 꼭 그럽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