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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Feb 21. 2020

소개팅 파스타와 배달 파스타의 상관관계


글과 관련없는 파스타지만 파스타라 일단 올려본 파스타 1






 스파게티의 고오급 말이 파스타인 줄 알던 코찔찔이 때부터 최애 외식 메뉴는 스파게티였다. 피자헛이 외식의 메카였던 그때 그 시절, 치즈 오븐 스파게티는 안 시켜주면 섭섭한 메뉴였다(실제로 안 시켜줘서 섭섭한 일이 많았다). 태어나서 라면 빼고 처음 만들어 본 음식이 파스타, 독립하고 제일 자주 해먹은 것도 단연 파스타. 삶은 면에 시판용 소스만 부으면 되니 얼마나 간단하게요. 가게 별점 찾고 리뷰 찾고 하는 까탈은 스스로에겐 이토록 관대하다.

 한국 사람이라면 파스타 한 접시에 말 못 할 사연 하나씩은 있는 법.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사이 포크에 돌돌 말린 면발이 촘촘하다. 칼국수도 잔치국수도 아닌 파스타 면발이. (파스타를 명예 k-푸드로 임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다). 그 사연의 전당에 오른 것 중 팔 할은 소개팅일 거다. 경련 직전의 얼굴 근육을 유지하며, 접시 두 개를 앞에 둔 남녀가 하하호호 포크로 면을 감는 동시에 상대도 감을지 말지 탐색하는 이 작위적 식사. 쌀밥과 국물의 민족에게, 세상 모든 음식에 불닭소스를 뿌려 먹는 캡사이신의 민족에게, 어쩌다 머나먼 이국 땅의 면요리가 소개팅 대표 메뉴가 됐냔 말인가. 파스타가 첫 만남에 좋은 이유야 꺼내면 구만개겠지만, 둥글고 흰 접시 위 면 뭉치를 보노라면 소개팅러들의 후기만 모아도 대동면지도가 완성될 거란 생각을 떨칠순 없다. 소개팅 용 파스타 맛집 지도 앱 만들면 못해도 중박은 치지 않을까. <이 집 메뉴가 너무 늦게 나와요 비추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대화주제 없음 개뻘쭘함> 이런 한줄평 모아다가.

 이렇게 구구절절한 앞단은 주말 사이 새로운 사연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결과부터 공개하자면요, 소개팅은 망했습니다. 그건 파스타를 고르는 순간 예견된 걸지도 몰랐다.



 콤비네이션 피자 싫어하는 이유, 올리브 빼기 귀찮아서. 서브웨이 메뉴 시킬 때 딱 한 개만 뺄 수 있다면, 제 원픽은 올리브입니다. 대체 이거 무슨 맛으로 먹나요, 네? 이천만 올리브 인구(출처없음)가 분노할 얘기지만 난 올리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밝힌다. 소개팅은 다소 오랜만이었고 상대도 그렇겠지만 나는 정말 몹시 어색했다. 시공간이 비틀어지는 어색한 기류를 뚫고, 남자는 메뉴부터 고르자며 정중한 모양새로 권유했다. 어색해 뒤지기 직전이었지만 밥은 먹고 뒤지는 게 나았다. 가독성 떨어지는 메뉴판을 정독했다. 그 순간 오일 파스타로부터 강력한 신호가 왔다. 날먹어라날먹어라. 선택지는 세 개였다. 봉골레. 조갯살 바르다 손등 힘줄 자랑할 일 있나, 패쓰. 이름 되게 어려운 어떤 거. 재료 보니까 고춧가루 떠다닐 각이구만. 먹는데 이에 꼈다? 근데 그거 한바탕 얘기하고 나중에 화장실 가서 발견한다? 그 자리에서 세면대에 머리 박아야 하잖아요. 이것도 패쓰. 남은 선택지인 올리브 뭐시기 파스타는 합리적 선택 같았다. 뭐, 골라내면서 먹으면 되지. 안일하고도 안이했다.

 메뉴가 나왔다. 상대의 크림 파스타가 먼저였다. 거기 다시 갈 확률이 그 남자한테 내 손으로 연락할 확률과 비등하나, 단언할 수 없는 미래의 어느 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거 시킬 거다. 겁나 맛있어 보였다. 곧 내 메뉴도 나왔다. 흰 접시가 앞에 놓인 순간 메뉴가 잘못 나온 줄 알았다. 혹시 이거 까맣게 갈려 있는 , 면도  보이게 까맣게 덮은   같은 , 이거 올리브? 다져지다 못해 탈탈탈 갈려진 것들은 이 사이에 끼이기 위한 거룩한 사명 같은 게 있어 보였다. 일부러 소개팅 망쳐보려는 사람을 위해 구비한 건가. 3초 정도, 이에 까만 게 낀지도 모르고 목구멍 열고 웃는 상상을 했다. 사회적 체면이나 위신 같은 거 황사 마스크로도 걸러지지 않을 만큼 미세하기 짝이 없지만, 없는 거나마 지키고 싶었다. '이 사이에 올리브 끼우고 쳐 웃던 인간' 같은 장면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것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먹는 내내 웃지를 못했다. 심지어 이 올리브(새끼)가 애매하게 여기저기 튀었다. 정신 차려 보니 손등에 떨어져 있었다. 모르는 새 눈썹 사이나 코 옆에 점처럼 붙어버릴 모양새였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양 한 입 먹고 티슈로 입 닦고, 한 입 먹고 입 닦고 했다. 안 그래도 어색한 대화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반도 못 먹고 내려놨다.

 그리고 이후의 일을 복기하자니 기억이 모호하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게 '나에게 좋은' 사람을 의미하진 않았다. 금 같은 주말의 세 시간. 그 안에서 상대 인생의 얼마를 봤을까. 긴 인생의 고작 점 같은 시간은 결코 충분하지 않지만 또 어떤 의미론 충분했다. 정중한 끝인사는 다시 보지 않을 걸 암시하는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날이 됐다. 한바탕 청소 아닌 청소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어제 반도 못 먹은 파스타가 생각났다. 나가자니 밖은 너무 추웠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는 음식 배달시켜본 적 없었는데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걸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칼바람을 뚫고 파스타가 왔다. 새우 잔뜩 들어간 매운맛의 오일 파스타는 온전한 나의 취향, 나의 음식이었다. 페퍼론치노의 잔해가 떠다니지만 이에 낀다 한들 상관없고, 침묵이 무서워 아무 말이나 지껄일 필요 없이 맛녀석 클립이나 틀어 두면 그뿐이었다. 그래그래 파스타가 어 이래야지. 사람 못 먹을 거를 막 갈아다 얹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여간 사람이 안 하던 거 하며 살면 오래 못 산다. 그치그치. 손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접시 위 소개팅 파스타의 허기를, 그렇게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와 달려온 배달 파스타가 채운다. 홀로이기에 철 없고 제멋대로인 이 독립이, 아직은 너무 편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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