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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Mar 13. 2020

달라진 일상에서 나를 여전하게 지킨다는 것



  마스크는 몇 개 남았냐. 별 일은 없는지 안부차 카톡을 보내던 엄마는 요즘엔 마스크 생사 여부 체크로 말을 바꿨다. '마스크 가지고 있어요?'가 '안녕하세요'를 대신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제법 넉넉한 개수의 마스크가 남아 있다. 실은 이거 다 꾸준하게 엄마 말을 듣지 않은 내 덕이라 할 수 있다. 미세먼지 농도를 아침마다 확인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잔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환절기만 되면 어디선가 마스크가 박스 단위로 배송이 됐다. 미세먼지 나쁨인데 안 쓰고 출근하는 거 걸리잖아, 그럼 바로 '마스크!!!' 하는 고함이 귀에 때려 박히는 거다. 온 집안의 기관지 건강을 챙기는 게 그녀의 일과라면 그걸 그대로 가방에 쑤셔 넣는 것이 내 일과. 차곡차곡 마스크를 수집해 다시 한 박스 양을 만든 적도 있다. 물론 걸렸다.


 독립을 했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본가에 갈 때마다 마스크를 한 아름씩 안겨주는 걸 차마 귀찮다고 할 수는 없어서, 제발 쓰고 다니라는 말에 예이예이, 엉성한 대답만 열심히 했다. 그렇게 안 쓰고 쟁여만 두었던 걸 요긴하게 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엄마 말 안 들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까불다가 간만에 욕 들을 뻔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틈틈이 사두라는 말에는, 그래도 진심으로 알겠다고 했다. 집에 있으면 내가 어떻게든 챙겨줄 텐데 너 이제 혼자 사니까 알아서 챙겨야지. 집 나가서도 말 안 듣는 딸이 뭐가 예쁘다고, 여전히 걱정이 태산인 그녀에게 경례하는 라이언 이모티콘을 하나 더 보냈다.




 1인 가구로 살 때는 불행이나 고통을 나누는 제수가 1로 변한다.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든다는데, 그걸 나눌 수 있는 구성원이 나뿐이다. 혼자 있을 때 아픈 게 더 서럽고 쓸쓸한 건 이 탓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이 범세계적 바이러스로 일정한 생활 방식에 균열이 생기고 당연스럽게 이어지던 일상이 몇 달 전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금, 홀로 이 시기를 버티는 건 가족과 있을 때 보다 조금 더 힘겹다.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 속에서 나를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건 스스로의 마음과 일과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의 배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부정과 분노에 자칫 휩쓸려가지 않도록 일상의 영점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라도 긍정을 끌고 오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문득 일과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당연스럽게 주어졌었는지 생각해본다. 이를테면 도로 위를 달리는 야쿠르트 배달원의 카트라던가, 지각하지 않기 위해 숨차게 뛸 수 있었던 오전 8시라던가, 스스럼없이 잡았던 지하철 손잡이나 건물 문고리라던가. 미련하게도 사람은 결핍으로 감사를 증명한다.





 회사는 지난주부터 단축근무에 돌입했다. 한 시간이 줄어든 업무시간. 에게 고작? 했는데 막상 퇴근하니 온 거리가 환했다. 기온도 올라가고 하늘도 맑았다. 그렇다고 밖에서 뭔가를 할 순 없었다. 빠른 귀가만이 답, 독거인에게 늘어난 시간은 '혼자서 뭐라도 해야 할 시간'이 늘어났다는 의미였다. 뭘 할 수 있을까. 생산적인 일들을 떠올렸다. 공부를 하거나 자기 계발이라고 부르는 그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마저도 효율을 생각하는 걸 보면 한국인이 맞긴 맞는가 보다. 그러다 말았다. 지금은 하루를 잘 버틴 것만으로 기특히 여겨주어도 될 것 같았다. 덜 우울하고 침울해하며 조금 더 웃었고 유쾌했으면 충분했다. 나는 나를 그렇게 챙겨주어야 맞았다.


 수다를 떨 사람이 없으니 왁자지껄한 예능을 틀어둔다. 좋아하는 노래 틀어놓고 춤도 춘다. 하여간 뭐든 보는 눈 없으면 용감하다. 안 먹던 영양제도 꼼꼼하게 챙겨 먹고 집 청소도 평소보다 자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시기를 혼자서도 잘 보내보려 무엇이든 해보는 중이다. 가족 톡방에서 한바탕 싱크대 청소를 했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더니 엄마는 '철들었네ㅋㅋ' 라며 웃었다.


 요즘 나의 주된 일과는 나를 심심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커피를 400번 저어 먹는 유행처럼 다소 실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피로해진 마음에 마스크를 씌우는, 혼자서도 잘 지나가는 방법인 것 같다. 오늘은 반찬 가게에서 무말랭이를 사 오면서 근처 꽃가게에 들렀다. 이천 원짜리 라넌큘러스 한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작은 걸 보며 정말 봄이 코 앞이라는 걸 실감했다. 봄이 오는 중이다.












 *아래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심심한 1인 가구인들에게 추천하는 엄선된 리스트. 일단 해보면 재밌을지도.




1. 스도쿠

- 심심하다고 계속 징징거리니까 동생이 추천해준 솔루션. 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어플로도 스도쿠 게임이 많이 있지만 책으로 사는 걸 추천한다. 핸드폰을 보지 않아 온갖 시끄러운 뉴스들에 덜 스트레스받는 것이 장점. 단점은 코로나 스트레스를 피하려다 다른 스트레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숫자는 늘 신중하게 채우자)




2. 미로 찾기 / 낱말 퀴즈

- 스도쿠로 아파진 머리를 식히려고 시작했다. 역시나 책으로 된 것을 구매. 스도쿠와 같은 장단점을 가진다. 특히 미로 찾기는 심심풀이로 하기 좋다. 열심히 미로를 따라 선을 긋는 스스로가 되게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만 역시 사람은 하찮은 것에 마음을 잘 준다.



3. 핀터레스트로  사진 수집

- 옷을 좋아한다면 꽤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핀터레스트는 보통 브랜드 콘텐츠 기획할 때 보는 사이트이지만, 인사이트를 얻고 싶은 분야의 이미지를 수집하기 좋기 때문에 일상에서도 쓸모가 많다. 좋아하는 류의 옷들 위주로 핀을 꽂다 보면 비슷한 류의 다른 이미지도 추천해주기 때문에 OOTD를 위한 좋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가장 큰 단점이라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뭘 사고 있다는 것.




4. 혼잣말 하기

- 이미 생각보다 많은 혼잣말을 하고 있는 중일 테지만 좀 더 많은 양의 혼잣말을 해보자. 집 안의 적막은 사라지고 활기가 돌 것이다. 이따금씩 현타가 올 수 있다는 게 주의사항. 벽간 소음이 심하다면 비추한다. 옆집에서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5.  해 먹고 남은 밥으로 누룽지 만들기

- 퇴근 후 남는 시간에 요리를 해보자. 여기서 포인트는 요리가 아니라 남은 밥으로 만드는 누룽지. 프라이팬에 남은 밥을 얇게 펴고 물을 살짝만 부은 채로 중간 불에서 10~15분 정도 앞뒤로 구우면 된다. 간단한데 시간이 잘 간다. 그렇게 차곡차곡 누룽지를 수집하는 재미도 쏠쏠.




6. 옛날 일기장 보기

- 괜히 청소하다가 발견해서 보지 말고 시간 많은 지금 보자. 새록새록 옛 추억에 잠겨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장점은 일기장 찾다가 청소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일기장 찾다가 청소 거리 만들게 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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