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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Mar 19. 2020

눈물 젖은 계란말이를 먹고서야 비로소 독립이 실감됐다


 이번 주치 장을 보러 마켓 컬리에 들어갔다. 세상에 저렇게 플레이팅 해먹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음식 사진을 쭉쭉 내리며 이거 맛있겠네, 저거 맛있겠네만 30분이 넘었다. 결국 결제창까지 들어가는 건 거기서 거기면서. 넷플릭스에서 영화 보는 시간보다 무슨 영화 볼지 고르면서 부유하는 시간이 더 많은 거랑 같은 이치다. 장도 요리하던 놈이 잘하지, 안 하던 인간은 김치볶음밥에 들어갈 재료 정하는 시간이 레토르트 김치볶음밥 팩 사서 입으로 들어가는 시간보다 느리다. 아무래도 독립하면 매일 요리해 먹어야지 생각했던 사람은 지금 이거 쓰고 있는 이완 다른 인물인가 보다.


 지난주엔 정말로 오래간만에, 엄마 반찬을 받아왔다. 쌀밥에 진미채 넣어서 김에 싸 먹는데 그게 너무 맛있어서 냉큼 싸가지고 서울로 튀었다. 서울 집 냉장고 한 칸 가득 반찬통이 들어섰다. 허리를 숙여야 하는 이 작은 냉장고에 뭐가 가득 들어 있던 게 꽤 오랜만이다. 월요일 저녁, 진미채와 김을 꺼내놓고 밥을 싸 먹으면서, 문득 이사 첫 주가 생각났다.




 독립이 처음이니 막막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끼니 해결 같은 중대 사항은 엄마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는 짓이 딱 빵이나 과자 먹고 치울 폼이라며 엄마는 혀를 찼다. 짐가방엔 온갖 조미료에 집 반찬은 물론이고 과일과 견과류까지 들어차 있었다. 저 이민 가나요 혹시? 나는 웃겼는데 엄마는 웃지도 않고 신신당부를 했다. 잘 챙겨 먹으라고 쫌.

 

 이사 첫날과 둘째 날은 죄 밖에서 밥을 해결한 탓에 반찬통을 꺼내든 건 삼일 째가 되어서였다. 저녁 시간이었지만 부엌에서 들릴 법한 소리 같은 건 없었다. 밥 먹기 전인데 이렇게 흥이 나지 않다니. 그나마 소란스러운 건 전자레인지였다. 전자레인지를 혐오하던 엄마가 내다 버린 탓에 없이 산 지 6년 정도 됐다. 이게 소리가 이렇게 컸나. 2분이 경과했다는 걸 알리는 신호는 소음에 가까웠다. 반찬을 접시에 옮기려고 하나씩 늘어놨다. 가짓수가 꽤 됐다. 뭘 또 이렇게 바리바리 싸줬어. 진미채에 멸치볶음에 콩자반에 계란말이에 김치에, 늘 먹던 저녁 반찬은 접시 탓이었나 수저 탓이었나. 괜히 낯설었다. 잘 먹겠습니다. 습관이 된 지 이십 년은 넘었을 문장도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만 거다. 돌돌돌, 가지런하게 말린 노란 것과. 사람이 그렇게 빨리 울 수 있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배우들 눈물 연기하기 전에 계란말이 앞에다가 좀 놔주세요, 직빵입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우는 나조차도 당황스러웠지만 원래 그럴수록 멈추는 게 어려운 법이었다. 한참을 엉엉 울었다. 밥 먹는 데 왜 나 혼자야. 엄마는 하여간 하지 말라니까 계란말이를 싸줘가지곤. 이제 매일 이렇게 밥 먹어야 하나 봐. 누가 보면 최후의 식사를 앞둔 혹은 사약이라도 받은 사람의 꼴이었다. 이렇게나 허술하고 기운 없는 감정의 둑. 고작 계란말이에, 잘게 다져진 야채가 쫑쫑 박혀 들어 있는 그 익숙한 모양새에 터지고 무너져 내렸다. 매일 홀로 부엌에서 밥을 안치고 반찬을 하던 뒷모습이 생각났다. 퇴근하고 들어가면 쉬기 바빠 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장면이 이제야 중앙으로 들어왔다. 이 귀찮고 힘든 걸 삼십 년 가까이해놓고선 또다시 프라이팬에서 계란을 돌돌 말아 반찬 통에 가지런히 담아 보내는, 엄마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얼마 전 리디셀렉트에서 황선우 작가의 아티클을 읽었다. 집안일이라고 부르는 가사 노동에 대한 이야기. 독립 전이었다면 그녀의 문장에 더해지는 공감은 피상적이고 간접적이었을 거다. 문장에 밑줄을 긋고도 그은 사실조차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독립을 하고 나서야 안다. 탈모가 의심될 만큼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개수나, 조금만 부주의 해도 기분 나쁜 냄새가 올라오는 싱크대나, 빨고 건조하고 널고 개어서 정리하는 지지부진하고 지루한 과정을 동원하는 빨래, 이삼일만 청소를 게을리 해도 뽀얗게 쌓이는 먼지, 음식은 반드시 음식물 쓰레기를 동반하고 누군가는 그걸 밖에 내다 버려야 한다는 사실 같은 것들. 다 겪고 나서야 안다. 해도 티 안 나는, 그런데 안 할 수는 없는 가사 노동의 수고로움에 대해. 한 가정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가, 대부분은 한 명의 여성이 얼마나 많은 시간 홀로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삼일 째 되는 날의 저녁 이후 밥 앞에서 우는 청승맞은 짓 따윈 하지 않는다. 가끔은 요리라고 하기엔 좀 민망한 조리를 하거나, 이따금씩 엄마가 싸준 반찬에 반찬 가게에서 사 온 특별식을 곁들여 먹거나, 배달 음식을 시키기도 하며 끼니를 해결한다.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흐른 물기를 닦으며 귀찮다고 징징거린다. 이래 놓고 본가에 가선 소파에 드러눕기부터 하는 아이러니를 보니 철들려면 한참 멀었다.


 그래도 꼭 한 가지 마음만은 다짐하는 거다. 이 지지부진한 노동을 아직도 해내고 있는 그녀에 대한 감사. 미성숙이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목엔 언제나 그녀의 무한한 사랑과 돌봄이 있었음을. 저녁 반찬으로 계란후라이 하나를 겨우겨우 부쳐내며 되새김질 한다.




회사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능력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돌봄이 협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략) 내 노동은 누군가의 가사 노동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1인분의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건 1인분의 가사 노동이다.  

황선우,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 가사 노동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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