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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Apr 02. 2020

쿨타임이 찼습니다, 청소를 시작합니다


 뭐든지 때가 있다. 프라이팬 위의 계란을 뒤집어야 할 때, 컵라면의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야 할 때, 썸에서 연애로 넘어갈 한 방을 던질 때, 팀장님에게 장기 휴가 얘기를 꺼내도 구박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세상 모든 일엔 놓치지 말아야 할 적기가 있다. 공기의 온도가 느슨해졌다. 보일러의 난방 버튼을 껐다. 오고 만 것이다. 봄맞이 대청소의 날이.



 겨우내 보고도 모른 척했던 창틀의 먼지를 닦아내는 것으로 청소가 시작됐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몸에 닿을 때마다 부드럽게 으스러지는 바람.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지만 꽃을 피워내긴 충분한 온도. 이제 온 거리에 벚꽃이 피어오를 것이다, 따위의 감상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걸 보니 확실히 청소가 하기 싫은 거다. 누군들 집안일을 태어날 때부터 잘해서  역시 살림꾼 완전 집안을 뒤집어 놓으셨다 진짜 최고의 살림꾼 파이팅 소리를 듣는 운명이겠냐만은, 나는 정말이지 가사노동에 흥미가 없다. 세상에 걔 보다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아직 이 정도면 깨끗한 거지 뭐, 살만합니다 안 죽어요 사람. 타당하고 정당하다 못해 정의롭기까지 한 변명거리는 언제나 넘쳐난다. 그런 집안일 노흥미러인 사람이 대청소를 한다는 건 꽤 기념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메뉴는 기억나지 않지만 꽤 급하게 먹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저녁을 먹고 체했다. 소화제를 먹어도 더부룩한 속은 나아지지 않고 두통까지 몰려왔다. 어지러웠다. 구토감이 몰려왔지만 정작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우면 누워서 어지럽고, 앉으면 앉아서 어지럽고, 어쩌란 거냐 이 거지 같은 몸뚱아. 구급차라도 불러야 하는 건가 화장실 문 앞에 주저앉아서 골골거릴 때였다. 집이 너무 더러웠다.


 예? 갑자기요? 응 갑자기 그랬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청결 상태가 엉망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유쾌하지 않은 어떤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이대로 내가 쓰러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기절했는데 누가 발견하기 전에 내가 죽으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나를 이송하고 경찰관들이 이 집을 보면 뭐라고 수사할까. 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세 짝의 양말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나머지 한 짝에 대해서?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영수증은 어떤 이유 때문에 버리지도 않고 모아둔 것인지에 대해? 빨래 건조대 위에는 왜 행거보다 많은 옷이 걸려 있는지, 멀쩡한 쓰레기통을 놔두고 왜 비닐 봉다리에 쓰레기를 모아 두고 있는지, 방구석에 먼지는 왜 저렇게까지 쌓여 있는지 이런 거 수사하려나? '수사 기록 : 고인의 방은 너무 더러워서 수사가 어려웠음'. 명언 수준은 아니더라도 떠나는 마지막 길에 남는 문장이 저럴 순 없는 거였다. 내 인권 내 명예, 하찮고 작지만 소중해. 주말에 당장 청소해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겨우 잠든 나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꽤 슬픈 사연으로 시작된 청소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나름 대청소랍시고 이불과 매트리스 커버도 다 벗겨서 세탁소에 맡겼다. 화장실과 부엌을 솔로 문지를 때마다 왜 양손잡이가 아닌지에 대해 한탄한다. 그렇게 묵은 때와의 전투를 치르고, 이사하고 처음으로 가구를 다 밀어낸 상태에서 바닥 청소를 했다. 그동안 보이는 곳의 먼지나 머리카락만 깔짝거렸던 탓에 여름과 가을, 겨울을 지나며 쌓인 먼지가 구석구석 소복했다. 이걸 죄 마시고 살았다니 미세먼지 안 마신다고 마스크 끼고 다니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집이 작다는 건 청소할 때만 유용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컸다간 성격 먼저 버렸을 거다. 큰 공간을 치우고 잡다한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아줬다. 어디 올려놓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자리를 차지했던 책들을 자주 손이 가는 책과 덜 가는 기준으로 구분해 책장에 꽂았다. 덮어놓고 사다 먹으니 한 짐이 된 약들은 상자 하나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바삭하게 건조된 커버들도 다시 이불과 매트리스에 씌웠다. 그렇게 구석구석, 집의 모든 곳에 내 손이 닿았다.  처음으로 하나의 공간을 온전히 나 혼자의 힘으로 털고 쓸고 닦아 냈다. 집이 생각보다 더 넓은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집이 예뻤다, 괜히. 세 개의 계절이 지났음에도 공간과 서먹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다는 건 이렇게나 다정하고도 억척스러운 말이다.



 다시 더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치우고 정리한다. 무질서는 언제나 속도가 빠르고, 질서는 순간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주는 행복은 크고 충만하다. 생각보다 힘이 든다 할지라도 더 자주 닦아내고 쓸어내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겐 필요한  힘을 내어 더하는  번의 비질.



 이 집에서의 첫 번째 봄이다. 지금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더 행복을 애써보기로 약속하며 첫 계절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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