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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Apr 09. 2020

더 잘 울기 위한 독립



 사춘기라는 건 접시에 담긴 얕은 물 같아서 미세한 움직임에도 파도가 일었다. 툭하면 눈가가 시뻘겋게 부었고, 그 틈으로 눈물이 비집고 들었다. 분해서, 억울해서, 화가 나서, 속상해서. 그래서 늘 울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대부분 이겨내지 못한 감정의 결과였다.

 니 뚝 안 그치나! 질질 짜고 있으면 어김없이 경상도 특유의 억센 억양이 다그쳐왔다. 울면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만큼 비겁한 게 없다는 훈육. 그게 별 효험이 있진 않았다. 부모님께 혼났다는 억울함에 눈물이 비집고 올라오면, 눈치 없고 주인 말은 더럽게 안 듣는 감정에 대한 짜증으로 눈물 양만 불었다.

 눈물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사소한 것에 시끄럽게 웃어 버리고, 주목받는 것 같으면 목 뒤부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의도가 불분명한 타인의 말에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고. 이 빌어먹을 감정들이 쥐고 흔드는 대로 끌려 다니던, 나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사춘기였다.





 이 시절의 얘기를 하면, 내 현재를 지나는 중인 주변인들은 의아한 얼굴이 된다.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사춘기라서 그런 거 아냐? 지금은 안 그렇잖아. 거기엔 별 대꾸 없이 끌끌 웃기나 한다. 회사 이사님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하셨다.


- 수 얼굴을 보면 평온한 게 득도하거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 같아 보여.
-...이사님, 저 교회 다니는데여.
-알지알지, 근데 그런, 뭐랄까, 부처의 바이브가 있어



 감정 기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른. 그건 어린 내가 바라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차가운 도시의 여자. 그 단어가 주는 능력 있고 당찬 미래를 꿈꿨는데 말이지. 실상은 클라이언트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광고와 나는 맞지 않다고 한탄하다 통장잔고로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아는, 그냥 서울 사는 직장인이 되긴 했으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현재의 서른은 누군가 잠시간 기대도 괜찮은 어른처럼 자라긴 했다는데 의의를 두자.


 그렇다면 그 울보 찌질이 홍조 환자는 성격이 바뀐 건가요? 아니요, 걘 그대롭니다. 완전 그대로 몸만 컸다니깐요.



 
 집에 돌아가는 순간 나는 사춘기로 돌아간다. 6평의 작은 공간은 감정을 쏟아내는 쓰레기통이면서 동시에 그걸 추스를 수 있는 안식처다. 이건 함께 사는 가족과 동거인이 없는, 오직 홀로 사는 독립인에게만 주어지는 자유다. 감정에의 자유.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있는 대로 감정을 던진다. 어바웃타임의 침대 맡 청혼 장면에서 펑펑 눈물을 쏟고, 비긴어게인의 OST를 따라 흥얼거리고,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제이크의 실없는 농담에 따라 쪼갠다. 실수 연발이었던 하루를 후회하기도 누군가를 탓해보기도 하고, 어쩔 땐 스스로를 미워해 보기도 한다. 엄마 걱정에 울다가 금세 저녁 메뉴 걱정에 정신이 팔리기도 한다. 이 모든 걸 쏟아내는 발신인도 수신인도 나 하나다.



 이따금씩 감정을 받아주는 동거인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동생이 지금 옆에 있었다면, 엄마가 있었다면, 덜 외롭고 덜 슬프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들은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다만 나 조차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쏟아내는 감정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낸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자주, 빈번하게 함께 사는 이들에게 저지른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자유, 그러나 수신자가 있다면 뱉어내는 말과 표정에 책임을 질 것. 그러니 홀로 살아가는 지금은 이 책임에 대한 유예일 수도, 연습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울고 웃고 화내고 발버둥 치다 갈무리된 이후엔 공간이 생긴다. 나 자신에게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여유가 될 수 있는 안정감. 뭐, 이사님 말마따나 해탈일 수도 있고. 어떤 것으로 불리든, 그 공간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을 껴안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니 적어도 홀로 있을 때 만이라도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웃고 그래서 더 잘 살아가기로 약속한다. 어영부영, 그때 그 사춘기는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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