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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Apr 23. 2020

넓이가 인격을 대신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저 지금 자취하고 있어요, 하면 열이면 아홉 정도에겐 '어디 사냐'는 질문을 받는다. 여기에 잠실 쪽이라고 에둘러 말하면 다시 그 아홉에 다섯 정도에게 '부자네!' 하는 말을 듣는다. 서울에서도 집 값 높기로 악명 높은 동네이니 그럴 법한 반응이라 생각도 들다마는, 아침 일곱 시에도 새벽 다섯 시 같은 곳에서 일어나 매일 출근하는 사람 입장에선 마냥 유쾌하지는 않다. 아니, 여기 남서향이라매요. 해가 이렇게 안 드는 게 말이 되나. 이 집 보증금이 어떻고 월세가 어떻고 하며 항변하는 것도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라 요즘엔 그냥 웃고 넘긴다. 열심히 얘기해도 대부분은 몇 주 안에 같은 질문을 또 하기 때문에. 아, 근데 어디 산다고 했더라? 잠실 쪽이요. 야, 너 부자네! 역시 사람은 생각보다 남들에게 관심이 없다.


 잠실에 터를 잡은 데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서 출퇴근이 30분 이내인 동네일 것. 유동인구가 많은 곳보다는 거주지역일 것. 대형 마트 같은 편의 시설이 조금 떨어져 있더라도 조용하고 안전한 곳일 것. 이 몇 가지를 기준으로 후보를 치우다 보니 이곳이었다.


 그리고는 집. 해가 잘 들어왔으면 좋겠고요, 창문은 최대한 컸으면 좋겠고, 풀옵션 신축 건물이면 더 좋죠. 근데 사장님, 제가 쓸 수 있는 돈이 천에 오십 정도인데요... 회사 동료의 소개로 안내받은 공인중개사 아저씨는 동네 터줏대감 같은 베테랑이었다. 구구절절한 내 얘기를 종이에 한참 휘갈겨 쓰시곤 딱 한 마디만 하셨다. 이 동네에 그 가격 되는 집이 없진 않은데, 어쨌든 몇 개는 포기 해야 한단 건 알고 있으세요.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 뺨이 다 얼얼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요것도 하고 싶은데 돈은 이것뿐이라는 예전 클라이언트가 생각났다. 그때 아마도 내 반응은 '어ㅋ이ㅋ없ㅋ성ㅋ'. 그날 아저씨가 비웃지 않으셨던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큰 창에 쏟아지는 햇빛, 거기에 깨끗한 올 화이트 인테리어. 그런 건 집주인의 센스가 아니라 죄다 돈에서 나온다. 창이 작은 건 아닌데 해가 들어오진 않고, 방 안은 깨끗한 흰 벽지이지만 부엌은 저세상 초록색으로 뒤덮인 공간. 이 혼탁한 공간은 정해진 예산 안에서의 최대이자 최선이었다. 이따금씩 느지막이 퇴근을 하는 날엔 주변 고층 건물들이 눈에 더 띈다. 부서질 듯 빛나는 고층 오피스텔과 고가 브랜드 아파트. 그것들은 어두울 때 보다 위협적이다. 오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 매매가로 십몇억원 씩 한다는 아파트의 층을 빼곡하게 채운 불빛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였다. 아, 저기에도 누가 살긴 사는구나. 그런 걸 보고 있다 보면 새삼스럽게 실감이 난다. 부자들의 동네에 빈자가 2년의 유예를 얻어 얹혀살고 있구나.

 
 친구인 구와는 삼십이 넘어서 부턴 이따금씩 집에 대한 얘기를 한다. 결혼을 준비 중인 그에게 집이라는 건 가장 시급하면서도 동시에 뒤로 미루고 싶은 숙제. 세상에 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살 데는 왜 없냐. 그 비슷한 얘기를 취업 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노동자가 되고 나니 고민은 다른 주제로 이동한다. 집에 대한 우리의 대화 주제는 이랬다. 집도 결국 돈을 들여 사기 때문에 물건에 불과해야 하는데, 왜 한 사람 나아가 한 가정의 정체성이 되어 버리는 것인가. 어느 동네에 사는지, 몇 평에 사는지, 빌라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같은 것들로 인격 모독을 하는 게 당연해진 세상에 대해 한참 동안 분통을 터뜨렸다.


집, 그거 뭐 없어도 상관없거든? 근데 집 없어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싶어.


 내 말에 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톨스토이의 오랜 고전에 대해 얘기했다. 결국 한 사람이 인생 최후의 순간에 필요한 땅의 크기는 시체를 매장할 수 있는 정도. 사회는 오랫동안 다다익선을 진리처럼 가르쳐왔다. 초등학생들 사에서 '빌거지, 월거지, 엘사'같은 말이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는 오래도록 충격이었다. 구와는 '엘사 되는 게 쉬운 줄 아나~'하고 농담 섞어 씩씩거렸지만 입 안이 썼다. 그들에게 주거에 대한 가치를 매겨 가르친 건 결국 누구인가.



 가져도 가져도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본성이고 이 본성의 말로가 납골당 한 칸만큼의 공간이라면 대체하지 않기로 결심해야만 한다. 공간의 넓이로 한 사람의 인격을 대신하여 이해하지 않기로. 조금 습하고 해 안 드는 원룸이 나의 인생을 대변하게 할 순 없는 거다. 이 공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하기 위해 쏟는 노력과 애정, 구석마다 쌓아 올려지는 취향들. 나를 설명하는 건 오직 그런 것들이어야 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주거 환경에 살 수 있기를, 내가 사는 사회가 주거에 대한 빈부의 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걷길 바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전에, 우리를 구성하는 외적인 어떤 것들도 한 사람의 인격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믿음. 그런 것들이 소유의 정도를 대신하는 선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부자의 동네에 사는 빈자. 이 문장으로 스스로를 설명했던 건 오늘부로 접어 넣기기로 한다. 어디에 살고 있던 간에 나는 그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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