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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May 21. 2020

퇴근하고 뭐 하세요?





- 요즘엔 퇴근하고 뭐 하세요?

 밥 먹다가 툭 던져놓고 아차했다. 정작 받는 입장일 땐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질문이면서. 물 흐르듯 나온 질문에 회사 동료는 '야근이 많아서 집 가면 자기 바쁘다'는, 광고 노동자라면 으레 할 법한 대답을 했다. 다행이었다. 뭔가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대답이었으면 나는 쪼그라들 뻔했다.

 퇴근 후의 삶을 묻는 건 마치 '언제 밥 한 번 먹자' 같이, 던지는 입장에선 가벼워도 받는 입장에선 상당히 묵직하다. 특히 퇴근 후의 삶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주변에 많을 경우엔 더. PT를 끊어서 다니고, 목공예를 배우고, 개인 브랜딩을 위한 굿즈를 만들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으면, '그냥 아무 것도 안해요'라는 대답을 내놓기 쉽지 않은 거다. 광고 회사라는 게 참 신기하게도, 일이 더럽게 바쁜 와중에 어디선가 뭘 계속 시도하는 유노윤호 형 인간들이 허다하다. 그 사이에 낀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벌레(=대충) 신봉자만 곤란하다. 퇴근 후의 삶을 자랑스럽게 내놓기 부끄러운 것이다.

 멀디 먼 본가에 살 때는 도합 4시간 가까운 통근 시간이 든든한 방패였다. 그 정도 시간을 땅바닥에 뿌리면서 다니면 다음날 살아서 출근하기만 해도 기특하게 여겨줘야 한다. 통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만큼 인성 버리기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나와서 사는 지금, 하루 이동 시간이 다해서 1시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선 뭐, 할 말이 없다. 물론 집에서 해야할 집안일이라는 게 있지만, 나만 하는 것도 아니고. 와중에 책도 내고, 굿즈도 팔고, 공부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낀 대충러는 자기반성의 연속이다.


 저녁 퇴근 길에 오랜만에 대화하게 된 다른 팀 회사 선배에게 퇴근하고 뭐 하냔 질문을 또 들었다. 어휴, 저는 너무 게을러가즈구, 아무것도 안해요. 괜히 오버스러운 손사레를 치며 대답했다. 그리고 집에 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존재임을 변명할 걸까.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꾸준하지 못했을 뿐, 운동을 하기도, 산책을 하기도, 장을 보고 밥을 해먹기도,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필요할 땐 푹 잔다.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흩뿌리듯 하고 있는 중이다. 아, 그러면 아마도 나는 이것저것 하느라 뭣 하나 진득허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나보다. 진득험의 결과로 보이는 걸 내놓지 못한 걸 아쉽게 여겼나보다.

 그런 내가 요즘은 그나마 진득하다 싶이 하는 건 이 글쓰기. 일주일에 한 편 글을 쓰자고 만들어진 온라인 모임이 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분들이 더 많지만 그들의 성실에서 힘을 얻는다. 그제야 나는 퇴근 후에 '글을 쓴다'고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생각해보면 누가 봤을 때 보암직한, 그럴 듯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스스로가 성취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결과물. 그것만으로도 뿌듯한 하루를 보낸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고 소소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들어 낸 결과물. 그런게 자주, 내 하루에 있다면 어떨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글쓰기가 습관처럼 자리잡고 난 후에는 또 어떤 것을 삶에 자리잡이 시켜볼 수 있을지, 다음 또 다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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