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올 3월. 원체 혼자서 이곳저곳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는 역마살형 인간이 강제로 실내 생활을 하게 되면서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쓸데없는 짓은 다했다. 잘 보지도 않던 예능을 돌려 보고, 셔츠 사고 양말 사고, 쿠키 굽고 또 굽고. 네이버 명예 제빵사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 주 토요일 하루를 꼬박, 심심해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다며 동생에게 한탄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사람 징징거리는 거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그녀는 얼추 받아주는 시늉을 취했다. 그러다 다음날,
- 갑자기 생각났는데 심심하면 근처 서점 가서 스도쿠나 퍼즐책을 사
평소 같았으면 숫자 놀이는 수능 이후 끊었다고 말했겠지만 어디선가 냄새가 났다.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대존잼의 냄새가. 서점을 가라는 말이 외출 허락 신호인 마냥, 인터넷 예배를 다 드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입문하게 된 것이 81개의 칸과 씨름하는 스도쿠.
앉은자리에서 끈덕지게 한 가지 일을 끝내는 그녀완 달리 집중력이 머리 풀고 자진모리장단에 춤을 추는 나는 '두뇌집중훈련 퀴즈' 같은 덴 흥미가 잘 생기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그런 걸 끈덕지게 하고 있는 수진일 따라 몇 번 시도해봤지만 규칙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람 농락하는 것 같은 화면은 집중보단 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 나 스도쿠 잘 못하는데..어려움ㅜㅜ
- 이것도 하다 보면 늘어 규칙이 있거든
그럴 리가. 1~9까지의 숫자가 가로와 세로, 정방 공간 그 어디에도 겹치지 않게 넣는 이 고약한 숫자놀이가 한다고 늘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거 늘어서 어따 쓴담.
그러니 스도쿠를 돈 주고 샀다는 건 나의 심심함이 어지간한 정도를 넘어섰다는 의미였다. 처음 한 장은 새로운 걸 한다는 생각에 설렜고 그 한 장을 다 채우기도 전에 집중력이 바닥났다. 너무 어려웠다. 답은 정해져 있다는데 내 눈에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규칙이 아니라 감과 운으로 숫자를 때려 넣어야 하는 거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고 하니 더 답답했다.
그런데 놀거리가 없으니 그걸 계속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스도쿠 끼고 있다가 잠들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연필을 잡았다. 너는 시방 내 안의 잠든 승부욕을 건드려버린 것이여. 약간의 광기와 집착은 며칠이 안되어 빛을 발했다. 푸는 속도가 빨라졌다. 규칙이 보이고 실력이 는 거였다.
그게 제일 신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거 같아서 덮어버리고 잊고 있다가 다음날 즈음 다시 열어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일 때. 이제 레벨 2의 77번째 퍼즐을 풀어가면서 느낀다. 고작 여기 퍼즐에도 인생의 묘미가 숨어 있었군.
꾸준하게 뭐든지 하다 보면 실력은 늘게 될 것이라는 어떤 순리와 오늘 보이지 않는 답은 내일 혹은 그 언젠가라고 시도만 다시 하면 찾아낼 수 있다는 섭리.
노답처럼 보이던 빈칸들을 하나씩 메워가다 하나 남은 칸을 채우는 순간 묘한 쾌감을 느끼면서 생각한다. 역시나 노답처럼 보이는 인생의 어느 장표를 만날 때도 이렇게 대해보자고. 어쩌면 하루 자고 일어났을 때 보이지 않던 게 보일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