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세로 살게? 다시 생각해보지.
- 잉 왜요?
- 야, 월세는 돈 절대 못 모아. 다달이 돈 나가는 거 보면 너 분명 후회한다.
이따금씩 이상한 지점에서 꼬인 성격이 툭 불거진다. '절대'. 나는 저 절대라는 단어를 보면 어디서 망치 같은 거라도 가져다가 두들겨 주고만 싶다. 모든 경우의 수를 차단하는 부사의 반례를 만들겠다는 어떤 승부욕. 월세 나갈 때마다 후회할 거라는 호언장담에 다시 한번 더 독립의 즐거움과 월세가 전세보다 나은 점들을 복기했다.
대중없는 기상 및 취침 시간을 간섭받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밤 열 시에 치킨을 시켜 먹어도 되는 향락! 1시간 45분에서 25분으로 획기적으로 줄어든 출근 시간! 전세 사기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쾌적한 쿨 거래! 대출을 끼지 않은 독립 인간으로서의 자부심!
월세살이엔 이토록 다 열거할 수 없는 장점들이 쏟아진다. 그러니 그깟 월세. 그깟 월세 55만 원이 대수야? 절대로 대수 일리 없을 줄 알았다.
절대라는 말에 고꾸라진 쓰디쓴 최초의 역사. 역시 돈 앞에 장사 없다. 딱 일 년 한 바퀴를 돌고 12번째 월세를 이체하는 날. 머리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나간 월세비를 셈했다. 660만 원. 사라진 660만 원은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었나. 흠 글쎄요,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반 정도? 딴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해버림 우째. 그러나 스르륵, 물에 씻은 솜사탕처럼 없어지는 돈은 어쩔 도리가 없다. 말이 집주인이지, 생판 남에게 보증금 맡기고 다달이 숫자를 여섯 자리나 찍어 보내는 중인 거다. 숫자를 찍어 누를 때마다 누가 심장을 때리는 것 같다. 아까 뭐 내려치겠다던 망치가 애먼 데서 힘을 쓰고 있었네.
와중에 월세에서 전세로 갈아탔다는 회사 동료들의 소식이 속속들이 들려왔다. 뭐지 이 지는 것 같은 기분. 남아도는 승부욕의 고삐가 또 이상한 데서 풀렸다. 나만 월거지로 생을 마감할 순 없지. 당분간 다시 살펴볼 일 없을 줄 알았던 부동산 어플 세 개가 나란히 깔렸다. 예산에 맞춘 월세집을 구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전세는 더했다. 대충 생각하는 조건의 집은 얼마 정도 하나 살펴봤다가 3억인가, 4억인가, 회사에서 프로젝트로도 자주 접하지 않는 금액이 어플 리스트에 펼쳐졌다. 아이고 꿈도 야무졌다. 역시 조건은 예산에 맞추는 거였다.
내가 원하는 보증금 액수에 따르면 지금 사는 동네에서는 단 2개의 매물만이 존재했다. 그마저도 예상보다 천에서 이천만 원 정도를 넘어섰다. 매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보다 더 나은 축에 속했다. 이 동네에, 이 가격에, 이 조건! 귀를 얇게 만드는 중개소 사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실은 그런 말 없이도 참 괜찮은 집이었다. 하나만 문제였다.
- 아, 이거 너무 아까운데. 남은 돈 부모님께 해달라고 하자. 졸라봐요.
제 집인데 왜요? 그 말이 나올 뻔했다. 공격성이 없는 말에 공격성을 띄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웃기만 했다.
낯선 말은 아니다. 집을 구할 때면 따라붙는 조언 아닌 조언.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는 누구나 살아보고 싶을 만한 집이 넘쳐난다. 가끔은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기도 하다. 그런 집을 꾸려가는 이의 연봉은 얼마일지, 저축은 얼마나 한 건지 가늠해보곤 했었는데,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작년 늦봄. 처음으로 공인중개사들을 만나고 전세 대출 알아보려 은행을 들락날락하던 그때. 멀기만 했던 신용이란 말은 더 멀어지기만 했다. 비로소 서울 집값이라는 단어가 나의 단어가 된 것이다.
스무 살부터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그걸 정정해줬다. 얘야, 너는 고등학교 때부터 정기적인 용돈을 받은 적이 없단다. 요즘 중고등학생들 평균 용돈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나는 얼마나 받았었는지 도통 떠올려지지 않았던 이유였다. 오 나 진짜 기특하다. 그 말에 엄마는 별 말이 없었다.
나의 재정적 독립을 스무 살 때부터라 생각한 건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시작한 시점이 수능이 끝난 그 해 12월부터였기 때문이다. 대학까지 통학할 교통비는 필요하지 않을까. 현실적 고민에 봉착하면서 시작한 과외는 지금 회사를 들어오기 바로 전전달까지 장장 8년간 이어졌다. 그쯤 했음 모은 돈이라도 있어야 가문의 자랑이라도 될 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총 세 시간씩 한 달에 35만 원. 투입 대비 효율은 높았지만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나 과외비 연체 같은 것들이 불안하게 흔들어대는 일자리였다. '간신히 풀칠한다'는 말을 이십 대 내내 쥐고 살았다.
딱 그런 삶이었다. 십 년 만에 겨우겨우 반지하를 탈출해 아파트 반전세로 이사한 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의 부를 가진 4인 가족. 부모님께 손을 벌린다는 문장은 나와는 멀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전세 매물이 없다고 가족 카톡방에 우는 소리를 냈다. 서울 집 참 비싸다 엄마. 혹시 못 구하면 나 안산에 받아주소. 당연히 받아주겠다던 엄마는 '잘해봐' 하는 다독이는 말을 보냈다. 딱 그뿐. 상황이 허락된다면 엄마는 천이고 억이고 내줄 것을 알지만 혹여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내가 사양이다. 부모님과 지금 이 관계가 참 좋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만은 분명하지만, 단지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일반적이라 말하는 수준을 주고받는 것이 절대적이라 생각하지 않는 관계.
아주 가끔씩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부모님이 원망스럽지 않냐는, 마음속 깊은 데서 물음표가 올라올 때가 있다. 그걸 구태여 건져내지는 않는다. 구태여, 정말 구태여 그걸로 스스로를 불행하게 할 필요는 없다. 대신 물아래에 가라앉은 질문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가난이, 벌리지 못한 손이 나의 온전한 독립의 세계를 만들고 있던 건 아닐까. 몸이 분리된다는 것만으로 독립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가정에 마침표를 찍어 본다.
자 그렇다면, 나는 올해 안에 전세살이를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월거지 라이프 종료는 바닥에 떨어뜨린 렌즈 마냥 어디론가 사라진 귀한 전세 매물님이 내 눈앞에 나타나 주셔야 가능하니까. 잘 보이진 않아도 어딘가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방법은 하나다. 가진 게 부지런함 뿐이라면 열심히 떨어대 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