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중독자에게 텍스트를 친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해내고 싶다는 건 인간의 가진 상상력과 창의력이 내려준 축복이겠지만, raw 상태인 무언가를 곱게 잘 다듬어서 최상의 결과로 내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라 하고 싶은 말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노트북을 꺼내 적어내기로 결심했을 때는 이미 머릿속으로는 완성본을 읽어내려 가고 있지만 손가락은 무거워지는 느낌이라면 내가 게으른 탓인가?
개발자라는 칠칠한 나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보니, 업무의 대부분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해나가는 게 일인데 잘 쓰여진 소설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짜여진 코드를 접하노라면 존경심이 들곤 한다. 개발 블로그도 취준생 시절 열심히 썼던 것과는 별개로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한 내용이 몇 퍼센트냐고 자문한다면 양심이 찔리곤 한다. 나는 생각하는 힘을 잃은 어른인 것이다.
지식과 지혜가 언제나 어디서나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지식을 가공해 재생산해낸 사람 또한 현자로 비춰지기 일수지만, 그 사람은 어쩌면 딜리버리 맨에 불과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잠시 보관한 뒤 책장 너머 어디로 사라질 것인가? 짧게는 6개월에 한 번, 길게는 일년에 한 번, 아이폰에 동기화 되어있는 사진들을 검정 삼성 외장하드에 저장하곤 한다. 그리고 그 많던 사진들을, 추억들을 단 한번도 꺼내보지 않는다. 일상은 추억으로, 추억은 영원으로 사라진다. 글과 그림을 쓰고, 그리고, 영상으로 남기고 하는 것들은 결국 잊혀지지 않기 위한 발악이지 않을까. 나 여기 있다고. 내가 여기 존재했노라고.
매우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고요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어날 때, 일할 때, 샤워할 때, 자기 전에도 영상을 항상 켜두고 다닌다. 덕분에 악몽을 꾸기도 하고, 외이도 염증도 종종 나지만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나야만 마음이 진정됨을 느낀다. 그래서 자주 듣는 목소리에는 괜한 내적 친밀감을 느끼곤 한다. 이 제작자들의 일방적인 One-Way 소통이지만 이젠 모두가 단반향 소통만을 하는 시대이다. 한 마디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은 귀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내 말은 왜 듣지 않냐며 생떼를 부리며 '진짜' 커뮤니케이션이란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그 어떤 시대보다 소통이 자유로워졌지만 단절되었다. 우리는 진짜 상대를 아는가?
아빠는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한 평생 근무를 했고, 대단한 활자 중독자이시다. 그 때문에 우리집은 책과의 전쟁이었다. 어린 시절 작은 아파트 거실의 한 면은 전부 이중 책장으로 되어 있어, 어린 시절 원숭이처럼 한 칸 한 칸 올라가다 책장이 기울어져 깔린 경험도 있으니까. 그 이후로 엄마의 역정에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나 했지만, 다시 한 움큼씩 재 생산(?) 되어지는 것 같은 책들 때문에 내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쟁 중 인가보다. 생각해보면 엄마도 엄청난 글자 중독자라 일주일에 꼭 한 두권씩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는 하는데, 글자 중독자들이 서울대를 가는 건지, 서울대에 가서 글자 중독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공부가 재능이던 부모님과는 다르게 손 재주가 좀 있는 편이라, 그림을 꽤 잘 그린다. 색을 보는 스펙트럼이 남들보다는 예민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원래 전공이던 보석 디자인과 보석 감정에서 덕을 좀 많이 본 듯하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게 아닌 그림이 너의 본진 아니냐. 돌아가라. 할 수도 있는데, 완벽주의적 성향에게 그림이란 스트레스가 쌓이는 원흉이라 차라리 빠르게 쓰고 지울 수 있는 글이 훨씬 후련하다.
맥기건 쉬라즈 와인 한 잔에 링크드인에 첫 게시물이 쓰려다 여기까지 와버렸네.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