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팀에 처음 합류 했을 때라..
계기는 대외활동이었다. 그때 우리 팀의 전 대표와 같은 조였는데, 이야기 끝에 개발자로 합류했다. 뭣도 없던 포트폴리오를 워드에 정리해 들고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5년 6개월이 지났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우리가 하는 사업도 계속 변했다. 나를 데려왔던 형은 1년 뒤에 그만두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지금까지 이 팀에 남아 있을까. 나는 왜 취업이 아닌 사업을 하고 있는 걸까.
군대에서 ‘부의 추월차원’이라는 책을 보았다. 새벽 당직을 서면서 밤새 읽었다. 충격이었다. 지금 처럼 살면 영원히 서민이겠구나. 사업만이 나를 구원해줄 동앗줄 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돈 걱정 없는 부자는 취업해서도 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시간을 더 되돌려 보자.
6살 무렵이었나, 짜장면이 먹고 싶어 엄마에게 떼를 썼던 적이 있다. 엄마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울고 불고 떼를 썼다. 저녁거리를 이미 정해 놓은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예정에 없던 지출이 나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농사 짓는 외할아버지를 보고 자란 엄마는 성실과 근검절약이 몸에 베어있는 사람이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한바탕 울고 난 뒤엔, 그닥 짜장면이 먹고 싶지 않아졌다. 그럼에도 계속 울었다. 엄마가 장난감 전화기를 들고 중국집에 전화하는 척을 해서 일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짜증이 나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날 짜장면은 먹지 못했다.
아빠는 경찰이었다. 그것도 범죄자를 잡는 강력계 형사였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공무원인만큼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경찰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셋째 큰아빠를 따라 주식 투자 시작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 게임을 못해 슬펐다. 아빠와 셋째 큰아빠는 모두 돈을 잃고 주식을 그만 두었다. 이후 아빠는 꼼장어집을 시작했다. 엄마는 퇴근 후에 집이 아닌 가게로 가서 일을 도왔다.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그것도 일년이 채 가지 못했다.
엄마는 이후로도 성실했고, 아빠는 이후로도 일을 벌렸다. 명절에 친척 어른들은 내게 ‘너는 커서 성실하게 직장일 해라. 공무원이면 더 좋고!’라는 말을 하곤 했다. 사실 친척 중에는 아빠 말고도 한량 같은 친척형이 하나 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은 대부분 회사원이었다.
스무살이 되어 숙제하는 느낌으로 군대에 갔다. 숙제가 끝나갈 때는 홀가분해야 하는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전역을 1달 앞두고 우연히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책을 봤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사업이 그 길이라고 책에 나와 있었다.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길은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게임만 하다 군대에 온 22살 이었다.
전역하고 전공을 컴퓨터공학으로 바꿨다. 컴퓨터로 하는 사업이 정답이라고 엠제이 드마고 씨가 그랬기 때문이다. 멋쟁이사자처럼이라는 프로그래밍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이 동아리에서는 이후 3년 동안 다른 학생들을 가르쳤다. 복학 후 1년 정도 지나고, 방학 때 개발 해커톤에 참가했다. 그때 지금 팀의 전 대표를 만났다. 전 대표는 개발자를 구하고 있었고, 나는 사업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서로 원하는 바가 일치했다. 몇 번의 미팅을 거치고 나는 지금의 팀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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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팀의 첫번째 아이템은 '맞춤형 화장품'이었다. 사람마다 자기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바로 제조해 보내주는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1년만에 사업을 접었다. 이때 나를 데려온 전 대표도 팀을 떠났다. 나는 팀에 남았다. 1년 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만두기 아쉬웠다. 나는 학교를 휴학해 나름의 배수의 진을 쳤다.
우리는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또 화장품이었다. 이번에는 맞춤형이 아니라 미리 제조한 제품이었다. 화장품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아무도 화장품 주 소비자가 없었다. 잘 될리가 없었다. 고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마케팅은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모르니까 무서웠고, 의지는 약했다. 결국 화장품 브랜드는 2년 넘게 지지부진하다가 끝이 났다.
그와중에 우리는 가전 브랜드도 시작했다. 20년도 하반기부터 21년 상반기까지 1년 정도를 화장품과 가전 브랜드를 병행했다. 어느 하나 잘 하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화장품 브랜드를 접고 우리 팀은 다시 한 번 뿔뿔히 흩어졌다. 3년 넘게 사업이라는 걸 해왔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개발은 진작 그만 두었고, 실무에도 자신이 없었다. 내가 해온게 실무라고나 할 수 있는 것들인가 의문이 들었다. 방법을 몰라서 헤매는 것인지, 그냥 내가 문제라 방법을 알아도 똑같았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주변 사람들은 하나 둘 취업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대학생활을 보내던 형들이 '일'을 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부정하던 회사원의 모습은 아니었다. 평범함과 비범함은 회사를 다니냐 사업을 하냐로 갈리는 게 아니었다.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난 여태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증났다. 난 안 될 거야하며 축처진 비하가 아니라, 머리에 피가 몰려 뜨거웠다.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짜장면을 사달라고 울며 떼 쓰던 6살의 그때처럼.
그래, 오기. 오기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