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일출봉'은 '한라산'과 견줄만한 최고의 제주도 랜드마크이다. 제주도를 찾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들리는 곳으로 따지자면 한라산보다도 훨씬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 일출을 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낮에 잠깐 들려 기념촬영하는 필수코스쯤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는 일조차 포기하고 돌아가는 이들이 많다. 일출을 보려는 각오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일출은 그리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구름에 가리지 않은 온전한 일출은 하늘이 허락하는 날에만 볼수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자신의 겉모습만 보고 가는 것에 대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고도 제주도 최고의 관광명소가 될 수 있는 성산일출봉이 더욱 더 커 보인다.
성산일출봉의 진면목을 아직 보지 못한 나이지만, 제주도를 찾은 3번 모두 방문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첫번째 왔을 때는 저녁 시간이었다. 정상에 올라 일출이 아닌 마을 쪽으로 지는 일몰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일출봉에서 일몰을 본다는 게 뭔가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성산 마을 뒤쪽으로 펼쳐진 수많은 오름들 너머로 붉게 지는 해의 모습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련한 추억에 젖게 만든다.
두번째로 성산 일출봉에 왔을 때는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나와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바다 저편으로 가득찬 건 해가 아닌 구름뿐이었다. 떠오르는 태양과 숨박꼭질하다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버렸다.
세번째, 이번에는 정오인 12시에 도착했다. 비수기라 그런지 한국인은 별로 없었다. 그 빈자리는 주차장을 가득 메운 중국인들이 채웠다. 뉴스로만 듣던 한국에 몰려드는 중국 관광객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다니.. 온통 중국말 밖에 안 들린다.
성산의 해돋이가 영주십경의 제1경을 차지할 만큼 멋지다고 하는데,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육지의 풍경만으로도 이미 '후회'라는 말은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 경치는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감동이기에 일출을 보지 못했다 해도, 올 때마다 다시 찾아 오게하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성산 일출봉은 십만년전 수중폭발로 생겨난 화산인데, 원래는 육지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섬'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1만년전 모래와 자갈이 쌓이면서 연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길이 열렸다, 닫혔다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 위에 도로를 만들면서 지금처럼 육지와 연결된 것이라고 한다. 보통은 인간의 덧댐이 자연을 해친다거나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사실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하는 나인데 이상하게도 성산일출봉 만큼은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처럼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았다는 '우도'!
성산포항에서 수많은 갈매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10분만에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섬이다.
왜 그랬는지 시간적 여유가 많다고 판단을 내려,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빌리지 않고 걸으면서 우도의 정취를 한껏 느끼기로 했다. 최종 목적지는 '비양도'까지 가는 것. 길을 헤메기 시작하며 몸은 점점 지쳐갔고, 행복한 미소를 남기고 지나가는 수많은 탈것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시간도 휘리릭 지나가 버렸다.
결국 비양도는 근처도 못 가보고 돌아오는 배를 타기 위해 급기야 수백미터를 뛰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역시 우도는 뭐라도 이동 수단을 타야 합니다..ㅠㅠ)
그렇다고해서 우도에서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간에 지름길을 찾아 보겠다고 샛길로 들어섰는데 사방에 '밭담'이 우거진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하..그게 무슨 소득이냐구?
여느 사람 같으면 이게 뭐야!! 하고 성을 냈겠지만, 낭만과 감성이 풍부한 나는 사방으로 펼쳐진 밭담의 모습에 그만 격한 감격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많은 제주도 여행자들이 찾는 우도의 한 복판에서, 그 누구도 찾지 못한 진한 제주도 밭담의 아름다움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우도에서의 모든 시간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우도에서 샛길을 찾다 길을 잃는 곳.'
'누군가에겐 최악의 장소가, 누군가에겐 최고의 명소가 되는 곳.,
그곳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도는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곳이 될 것이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막히는 제주시의 한 복판엔 옛날 제주도의 시청같은 곳 '제주목관아'가 있다. 사실 '제주목관아'는 일제 강점기때 모두 훼철되어 지금 있는 것은 모두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복원에 소요된 기와 5만여장이 전량 제주시민의 헌와로 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기왓장 하나도 허투루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제주시민의 기운이 전달되는 것 같아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하지만 너무 새것이라 그런걸까? 옛스럽지가 않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너무 새집 냄새가 나서 굳이 입장권을 끊어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그냥 감동적인 이야기로 마음을 채우고 돌아서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적이 느낌(?)이 든다.
제주목 관아 앞에는 넓은 광장을 품고 있는 '관덕정'이 우뚝 솟아 있다.
보물 322호, 철종 원년에 재건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쨋든 이 보물은 무료관람이다.
(새 건물은 유료인데, 보물은 무료? 뭔가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활쏘기 대회 때 본부석 기능을 했다고 한다. 세종때 처음 지어졌다고 하니 그 역사의 무게가 엄청난 장소임에는 틀림 없는 듯 하다. 관덕정은 제주의 중요한 사건이나 행사가 일어날 때마다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의미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정돈된 '넓은 길'로서의 기능밖에 안 남은 것 같아 안타깝다. 둘러 보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유동인구가 그 옆을 지나 다니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 보는 사람도, 잠깐 쉬었다 가는 사람도 없는 무관심 속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때 쯤 관광버스가 들이닥친다.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쏟아져나오지만 누구도 이 '보물'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보물'이라는 가치를 인정받고 고유한 번호도 부여 받았다지만, '보물'이 '보물'다울 수 있을 때는 그것을 '보물'로서 바라봐주는 이들이 있을 때이지 않을까?
관덕정 앞에는 2기의 늠름한 '돌하르방'이 서 있다. 그 '돌하르방'을 보자마자 나는 밝은 얼굴로 달려가 안아 주었다. 이 2기의 '돌하르방'은 제주도에 남은 45기의 오리지널 '돌하르방' 중에서도 가장 잘(?) 생긴 놈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숫하게 보아 왔던 '돌하르방' 이미지들의 원본을 실제로 만난 것이다.
하지만.....
'관덕정'과 함께 '돌하르방' 역시나 쓸쓸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해질녘 분주하고 스산한 시간대에 찾아와서 그런걸까?
이들이 정말 진짜 '돌하르방'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
알아주는 사람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 길거리의 고독한 할아버지로 남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제주를 지키려는 의지와 사랑으로 듬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다행스럽기만 하다. 나는 비록 잠시 왔다 가는 육지에서 온 여행자일 뿐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 어떠한 불평과 불만도 없이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돌하르방'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것 외에는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다.
관덕정에서 걸어서 약15분쯤 거리에 '오현단'이 있다.
제주성터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알고만 간다면 찾기가 어렵지는 않다.
오현단은 제주와 인연이 있는 다섯 분의 성현을 기린 단으로 원래는 귤림서원에 모셔져 있었는데 서원 철폐 이후 조촐한 조두석 5기로 만든 제단이다.
제주도 답사도 아니고, 여행 온 사람이 오현단을 찾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설명해 줄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볼만한 조형물이나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제주성터를 보러 왔다가 우연히 들리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는 곳이다.
소소한 재미가 있는 오현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난 그 이야기를 보고 말았다.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은 독자라면 여기까지 와서 쉽게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알고 온다고 해서 볼 만한 것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을 찾을 만한 '이유'가 생기고,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면, 굳이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행자에게 있어서 '이유'와 '의미'는 그만큼 그 여행을 풍성하게 하는 중요한 KEY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우는 시간이 된다.
(오현단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있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잘못된 정보조차 모를테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확률이 높다. 궁금하시다면 책을 꼭 찾아보시길..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