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적어도 그들은 내 전공은 예를 들어 '피아노'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 나아가 "저 피아노 잘 쳐요."라고 도달하는 건 다른 문제일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전공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부러 울 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한 길만 걸어온 사람보다는 두루두루 써먹을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 각광받는 시대가 온다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한 우물 깊이 판 사람을 더 높이 평가해주는 것이 사실이다. 어디 면접을 보러 가면,
"그런데 경력이 짧으시네요?"
라는 말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연봉협상을 할 여지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 아이들이 커가는 세대에는 평균 10가지가 넘는 직업을 갖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너무 일찍 태어난 걸까?
누군가는 위로한다고
"그래도 언어에 관련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잖아요?"라고 내게 말을 건넨다. 조금 더 오버를 보태자면
"너무 하실 줄 아는 게 많아서 그런 거 아니세요?"라는 말도 하신다. 그래, 그렇게 라도 없는 자존감을 이따금씩 끌어올려 보려고 애쓰지만 결국 "그래서 나는 무엇을 이건, 내 전공이지!"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치원 때는 시인, 초등학교 때는 극작가, 중학교 때는 작사가, 고등학교 때는 카피라이터, 대학교 때는 방송작가를 꿈꾸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커가는 하루하루 밖에 소재가 없었던 경력단절 여성이 된 이후로는 "일기나 쓰자." 하다가 "책을 써볼까?" 하는 마음을 먹은 것이 딱 1년 전이었다. 무작정 노트북을 들고 집 앞에 도넛 집에 글, 아니 책을 쓰러 간다는 나를 보며 남편은 기가 막혀했지만, 그래도 "뭐 책이 되겠어? 저러다 말겠지." 싶었는지 순순히 시간을 양보해주었다.
내가 쓴 글이 책이 된다는 무엇인지 모를 확신은 있었지만, 글은 글이고 생계는 생계였다. 그래서 글을 쓰면서 영어강사로 일을 했다. 글을 쓰는 것, 영어로 말을 하는 것 둘 다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나는 언어에 재능이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답을 얻었다면 나는 오늘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새 '출간 작가'가 되었다. 주변에서는 가끔 낯간지럽게 '작가님'이라고 하지만, 나를 소개할 때 작가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작가는 무언가 픽션을 창작해 낸 분들에게 양보해야 할 호칭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책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저자라는 단어를 써보고는 했다. 때로는 직업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
"아, 그게 직업은 아직 고민 중이고, 생계로는 학원 강사를 합니다."
라고 말하면 조금 이상한가? 학원강사일 자체가 무언가 직업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도 전문적으로 하시면 한 중소기업을 굴리는 것만큼의 규모로 크게 집중해서 하시는 분들이 있는 분야인데, 나는 이 분야에 "그래, 여기 깊게 발 담그기로 결심했어!"라는 마음은 갖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이다. '글재주는 어디다 써먹을 수 있는 건가?' 진짜, 문송합니다 라는 말이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털어봐도 이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날 닮았을 내 자식은 웬만하면 이과로 밀어 넣어 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
언어로 더 좁게는 글자로 더 솔직히 재주로 밥 벌어먹어 살 수는 없을까? 이 분야에서 내 모든 것을 걸겠어라는 마음의 동함이 없어서 그만두겠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그러자 상사분 말씀하시길,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나도 그만두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살아. 이거 그만두고 딱 하려고 정한 거 없잖아?"
그렇게, 다음 할 일을 정확히 해놓지 않았던 나는 그만두는데도 실패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만두려는 설득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꿈을 찾으러 퇴사한다니. 아, 정말 진퇴양난이다. 퇴사의 실패는 내가 무엇에 재능이 있는지 찾는데 또 한 번 실패했다는 사형선고 같이 내게 다가왔다. 이 여름은 그렇게 슬럼프였다.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도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것, 글 쓰는 것 아녔을까 생각했는데,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그 자체를 반겨주지 못하고 재능에게 자꾸 '혹시 네가 내 생계니?'라고 묻고 있는 내가 참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인데, 저는 "글 쓰는 게 제 전공입니다."라고 하는 게 너무 욕심쟁이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일까? 어쩌면 한 길만 파고 살아오지 못해서 글이 더 풍성해질 기회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