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리 집은 어디에] 좌절..

좌절..

by 스테이시

사실 이런 단어를 쉽게 쓰고 싶지 않아서 소 챕터의 제목을 이것으로 고르는 것에 대해 아직도 고민을 하고 있긴 하다. 지금까지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뭐 딱히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폄하하지 말고, 그냥 난 이 지점에서 땅속으로 무너져 내려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우리 아빠가 공무원이었다고 하면 다들 무난히 잘 살아왔겠네 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늘 우리는 전셋집에서 쫓겨나가는 시추에이션이었고, 늘 엄마는 카드 값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무언가 사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굉장히 긴 망설임으로 대답하셨다.


엄마에게 나도 매달 1일에 용돈을 주시면 내가 한 달을 경영하는 법을 배우겠다고 수없이 말했지만, 엄마는 나에게 용돈을 주시는 대신 신용카드를 주셨다. 마음껏 쓸 수 있으니 더 좋은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 난 알고 있다. 엄마는 현금이라는 것을 손에 쥐고 있었던 날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월급은 매달 은행에서 빚으로 뽑아가고 카드를 쓰고 이 악순환을 반복하다 보니, 나는 현금으로 용돈을 받아서 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지금 우리 가정도 엄마가 가르쳐준 경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나중에 커서 보니 내가 어려웠다고 말하는 과거보다 훨씬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혼하고 나서 새롭게 이룬 우리의 가정은 음, 내 상상의 가난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보다 어려웠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반전세 기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즉, 이 집에 계속 거주할 수 있는지가 불투명해지는 것이다. 시세를 물었더니 처음 반전세 보증금보다 3500만 원을 올려줘야 한다고 했다. 3500만 원이 아니라 결혼 후에는 35만 원도 내 잔고에 남아 있던 적이 없던 그때, 용감하게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복지제도는 장애인과 기초생활수급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으레 생각하던 때였다. 혹시나 지금 내가 기초생활 수급자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엄청난 용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 싶은 마음으로 동사무소를 향했다.


남편의 수입은 한 달에 70만 원이 될 듯 말 듯했고, 언제쯤이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남편이 점점 미워지고 이었다. 결혼한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남편은 분야를 바꿔서 일하겠다고 했다. 그때 결혼 후 곧 찾아온 아이가 뱃속에 있었다. 물론 나는 남편이 분야를 바꾸는 것에 강한 반대도 그때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응원해줄 만한 마음도 있지 못했다.


임신을 안 한 상태라면 남편이야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벌면 된다는 마음이었을 텐데, 이미 첫째는 우리에게 와있었다. 그때 절박한 마음에, 만삭인 상태로 SSAT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면접까지 간다면 아기를 낳고 다닐 수 있다고 우겨보아야겠다는 헛소리도 해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첫 번째 임신기간은 온통 회색 빛이었다. 아이를 위해 준비할 것도 많다는데, 나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살 수 없었다.


뭘 준비하는 것을 넘어서 과자 하나 마음 놓고 사 먹을 수 없었다. 월세 10만 원, 관리비 10만 원, 통신비, 교통비 등 늘 들어가는 기본 비용을 제하면 우리의 식비는 당신의 상상 그 이상으로 적었다.


빵을 그렇게 좋아해서 빵순이라는 별명이 있던 나는 임신 중에 빵이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마트에서 파는 긴 토스트용 싸구려 식빵을 사서 두고두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복숭아도 참 먹고 싶었는데, 누가 사준다고 해서 딱 한 번 먹었던 기억이 난다. 임신 기간 내내 아이를 만날 설렘도 한 번 갖지 못했다. 내가 잘 먹지 못해서 아이가 작은 건 아닐까, 남들은 다 준비하는 아기 용품이 없어서 아기한테 미안하지 않을까 별 생각에 그냥 침대 누워서만 지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렇게 만나게 된 첫째를 오랫동안 예뻐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신기하기는 했지만 사랑스럽다거나 그런 마음을 꽤 오래 갖지 못했다. 게다가 그 녀석은 남편이랑 똑같이 생긴 미니미였다.


더 처절했던 건, 시부모님도 부모님도 우리가 넉넉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알고 계셨지만, 한 달에 그 정도 금액으로 생활은 근근이 해나가고 있다는 것은 모르셨다.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서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말이다.


무언가 꼭 먹고 싶을 때나 필요할 때마다 은근슬쩍 엄마나 내 동생한테 이야기를 해서 아닌 듯 얻어먹어야 하는 내 마음은 정말 어디서나 눈칫밥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양가의 첫째 아이기에 많은 선물과 지원을 해 주셔서 간신히 애기는 굶지 않고 길러 냈던 것 같다.


난 먹는 것도 없는데, 모유가 콸콸 나와서 눈물이 났다. 만약 이 아이가 분유를 먹어야만 되는 아이였다면, 정말 분유를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좀 크자 의사는 영양이 부족하다며 이유식에서 매일 소고기를 먹이라고 했다. 매일이라는 말에 또 눈물이 났다. 아이는 매일 쌀죽만 주는 이유식에 익숙해져서 인지, 이후에도 다른 반찬이 있어도 밥만 먹는 아이로 자랐다. 어른들은 주걱에서 밥알을 띠어 먹는 아기를 보면서 귀엽다고 구경하셨지만 나는 너무 슬펐다.


나는 첫째를 키우면서 겨울 내복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다. 아주 나중에 둘째를 키우면서 겨울 내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첫째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내 자력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무늬만 엄마였다.


남편은 함께 있는 시간에는 육아를 도맡아 해 주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난 새벽형 인간이라 9시에 잠들어서 4시쯤 일어나는 패턴으로 30년을 살았는데, 아빠는 늘 밤 11시나 돼야 들어왔다. 아이를 돌보다 나는 9시쯤 아기에게 넌 왜 잠이 안 드냐고 마구 화를 내다가 나 먼저 잠들고는 하였다. 아이는 그때부터 엄마가 자도 혼자 놀다 잠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 또 내가 먼저 뻗어버렸는데, 내가 잠든 이후 아이가 응아를 했었나 보다. 밤에 다시 일어나서 보니 아빠는 아직도 안 와있고 아이는 나를 못 깨우고 응아를 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정말 너무 서러웠다. 안 그래도 가장 저렴한 기저귀를 쓰는데, 아이 엉덩이가 빨개진 걸 보니 미안함에 몸서리쳐졌다.


싱글 때처럼, 스타벅스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엑스트라 캐러멜 드리즐을 한 잔 딱 마시면 스트레스라도 풀릴 것 같은데, 이제 스타벅스에 가도 어색해서 주문을 못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육아 스트레스만으로도 미치는 일이 발생하는데, 가난한 엄마의 육아 스트레스는 정말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늘은 집을 나가야지 다 버리고 떠나야지 했다가도 잠든 아이를 보면서 나의 젖이 유일한 생명 줄인 너를 두고 어디가 수 있냐며 번번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남편하고 헤어지고 싶다고 수없이 생각했지만, 남편 하고 똑같이 생긴 이 아이만 내가 데려가서 남편을 신경 쓰지 않고 상관없이 키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살아보자 살아보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하면서 그날 동사무소를 찾아간 것이었다. 문 앞에서부터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 여기서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도 들었지만, 나의 이런 처절함을 부모님께 보이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으니 창피를 당해도 여기가 낫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내 평생에 마음을 짐이 있다면, 한번 도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난 늘 내 쌍둥이 동생에게 모든 걸 양보하는 착한 아이였다. 내 이름에는 심지어 착할 선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 한국어 이름을 쓰지 않는다. 더 이상 착하게만 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지만, 늘 내 동생은 나보다 영리하고 똑똑했고 친구들도 많고 성적도 잘 받아오곤 했다. 물론 외모도 나보다 뛰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동생은 중학교 때 반 1등을 도맡아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1등을 하자 엄마가 아빠한테 문자를 보내셨단다. 그리고 온 답은 “언제 한 댄스 대회였는가?” 였단다. 이렇듯, 늘 뭔가 부족한 딸로 10대를 보냈다. 그 이후에도 효도를 못했다. 사실 말이다.


간신히 공부에 재미 붙여서 홍대 서울 정말 턱걸이로 들어가놓고 첫 번째 학기에 학사경고를 맞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학 과목인 경영경제 수학과 회계원리를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화를 많이 내셨다. 그때 깨달았다. 아빠가 내 학비를 내주려고 대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빠는 자신의 대출금도 있으면서, 나에게 학자금 대출받으라는 소리도 안 하시고 또 빚을 내신 거였다. 그렇게 어렵게 내주신 돈을 나는 학고로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때 정말 세상에서 내가 제일 쓸모없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학고를 맞아서가 아니라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말이다.


나는 경영학과 수학을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다는 판단에 대학생 신분으로 다시 수시를 썼다. 한양대 안산 광고학부를 포함한 5 군대를 썼는데, 또 한 곳에서만 합격을 받았다. 한국예술 종합학교였다. 사실 한예종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한 소리지만, 교수님들께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가 한예종을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대단한 꿈을 이루고자 함은 아니었다. 학비가 싼 학교를 갈 수 있으면 아빠에게 덜 불효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었다.


그만큼 난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을 늘 갖고 살아와서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와줄 수 있으시냐라고 그 굶주리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날 동사무소에서 복지 담당 직원을 만났다.


“저희 지금 소득이 많이 적은 편인데, 도움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을까요?”

“남편 얼마 버시는데요?”

“70 정도요.”

“장애인 이세요? 문제 있어요?”

“아닌 데요”

“집은 자가 아니죠?”

“양가 부모님은 못 도와주세요? 그분들은 집 없어요?”


한 참 서서 동사무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취조를 당했다. 내 얼굴을 점점 붉어졌고 목소리가 떨려서 점점 대답할 용기를 잃어갔다. 결론은 양가 부모님이 자가가 있으실 정도면, 그들이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없단다.


그 날 집에 오는 길에, 아기 띠에서 자는 아기를 보면서 숨죽여 울었다.

“아가야 미안해”


다시 미성아파트로 돌아와서 앞으로 아가랑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엉엉 울었다. 그때 프뢰벨에서 책을 사라는 문자가 와서, 저 정말 너무 가난해서 책을 살 수 없으니 이런 문자 보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답장을 썼던 기억이 난다. 받는 사람이야 애는 뭐야 싶었겠지만, 정말 마음을 토로할 데가 한 군대도 없었다. 나중에 돈을 벌게 된다면, 꼭 우리 아가에게 책을 사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소리 없이 울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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