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적당히 벌다. 임대주택 이용자들의 용어사전.
이제 그럼 자아실현에 에너지를 쏟아보는 건 어떨까 하고 주거 프로젝트를 접으려던 찰나였다. 그때, 프로젝트를 마무리했으면 이 책을 안 썼을 것이다.
코엑스 무역사무 알바는 아이가 유치원 반일반에 진학하면서 쉬게 되었었다. 부서에서 내가 가장 오래 일한 터라, 다들 언니 이메일 계정 안 지 울게요 다시 오세요 라고 할 정도였고, 나도 애착이 참 많은 알바였다. 내가 자아실현 프로젝트를 오픈하려던 참에 마침 연락이 왔다. 부서에 계약직 풀타임 자리가 났는데, 오실 수 있냐고. 나이스 타이밍. 인수인계 기간도 정해 놓고, 시어머니 우리 엄마한테 무리해서라도 우리 애들 부탁 좀 드린다고 시나리오를 풀어놨을 때, 무거운 연락이 왔다.
HR 부서에서 경력직을 뽑으라고 했다면서 너무너무 미안해하셨다. 6개월 계약직을 경력? …… 그래 그렇다 치자, 경력이라면 내가 그 부서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바로 실무 투입 가능한 1인이었는데, 내가 알바로 들어가서 이력서를 낸 적도 없으니 HR에서는 내가 무자격자라고 여겼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다. 담당 대리님은 내정자라고도 애기해 봤다는데, HR이 그럴싸한 경력이 있는 사람을 원했 다는 것이 사실 특이할 일은 아녔다고 본다.
사회는 그런 곳이니까.
조금 씁쓸했다. 둘째 낳고 쉬고 다시 가고 햇수로는 4년, 실제 일한 것은 24개월, 여하튼,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자신 있는 일이었는데, 이어 가지 못하게 되었다. 나도 무자격한 알바가 시기 잘 타서 직원 되는 그런 캐릭터 아니거든 하고 토익 900 넘는 이력서 팍 내버릴까 하다가 됐다. 일자리가 거기밖에 없겠니 하고 말았다. 프로젝트 시작부터, 이런 일을 겪으니 좀 다운되긴 했지만, 이것 덕분에 더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그동안 해 온 스펙이나 학벌, 경력 그게 무엇이든 간에 대우받을 생각 조금도 하지 않기로, 경단녀는 맨 몸으로 처음부터 부딪 혀야 되는 거구나 라는 것을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니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아실현 프로젝트에 제동이 걸린 건 비단, 사회적 경단녀의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4인 가족으로 국민임대에 거주한다고 할 시, 월 소득이 올해는 약 409만 원이 넘으면 할증이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600만 원 정도에 이르면 퇴거해야 한다. 즉, 집에서 나가야 된다는 뜻이다.
장기전세 제도도 좀 더 기준은 높지만 퇴거 기준이 있고, 행복주택의 경우 입주 시에만 소득을 충족하면, 월 소득 퇴거기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내가 갑자기 큰돈을 벌거나, 돈을 벌어도 퇴거 소득에 도달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 는데, 어퍼컷을 날려주고 싶긴 했다. 나를 과소평가(?) 하는 것보다, 소득이든 자산이든 초과돼서 기쁘게 퇴거를 맞이하는 꿈이 없는 것에 화가 났다.
사실 퇴거까지 가지 않아도, 할증의 최대치는 140% 이므로 결코 적은 돈이 아닐 수 있다. 그리하여 고민해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제로 하는 일이어야 했다. 적당히 벌어야만 하다니. 돈을 벌면서 적당히라는 표현을 써야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집 근처에 이케야 고양점이 오픈한다고 했다. 이미 채용은 마무리되고, 추가 계약직만 모집하고 있었다. 16시간만 일해도 4대 보험을 해준다는 말에 덥석 지원을 했다.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착순 알바 같은 건가 하는 마음으로 면접에 갔다. 면접에는 오전, 오후 나눠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왔다. 헐. 이렇게 경쟁이 있는 거였다니. 면접장에는 이케아를 열망하는 재수생, 삼수생, 오 수생 면접자도 계셨다.
그런 분들 가운데, 감사하게 매니저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나랑 같이 면접 본 많은 분들 중에 단 한 분만 내 동기가 되었다. 공기업 계약직 이후 10년 만에, 내 이름으로 4대 보험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기뻤다. 사람들은 가끔 어떤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 묻고 했는데, 나는 늘 “4대 보험 되는 시간제 일자리요”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너무 사소하다며 비웃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경단녀가 그런 일자리를 찾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4대 보험이 돼야 아이들을 종일반에 넣고 그나마 일 할 수 있으니, 간절함은 더했다. 나는 16시간이라길래 8시간씩 이틀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스케줄은 아주 랜덤 했다. 그중 나는 야간 저녁 7시부터 밤 12시 타임을 가장 많이 하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을 찾아 놓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아이들이 7시까지 유치원, 어린이집에서 아빠를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린 나름 행복했다.
할증이 붙지 않는 범위 내에서 4대 보험을 가지고 시간제로 일할 수 있었고, 빚도 두 자리로 갚을 수 있으며, 자아실현까지는 모르겠으나, 육아로부터 독립된 나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이케아 가서 직원식당 밥만 사 먹어도 난 참 좋았다. 내가 사람들을 태워주면 언제 폐차할 거냐고 자꾸 묻는 내 꼬물 차랑 새벽 자정 넘어서 행주대교를 달리면, 내 차는 힘들어하면서 그래도 시속 80을 견뎌주었다. 90년대 가요를 들어가며 바람을 맞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위로를 받기도 했다.
행복하다고 표현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카트를 밀고 제품을 옮기는 일까지 해야 되어서 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출근 첫날, 일의 강도를 보고 앗, 잘못 왔다 싶었지만, 아까 다짐한 것처럼, 난 남아있는 자존심이 있다면 찾아내 끄집어내서라도 없애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경단녀였다.
뭐든, 견디자 부딪히자, 막노동도 해 본 게 자산이다. 난 이걸 하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견뎠다. 난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는 사회에 못 진입할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그런 나에게 우리 매니저는
“스테이시, 우리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사람을 원해요”라고 말하고는 하셨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었지만, 부양가족이 있는 아줌마가 일터에 나와서 즐기는 마음으로 일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참 어려운 요구사항이었다. 우리 팀은 여차 저차 했지만, 즐거웠고 가족 같았고, 모두 정들었고 행복했지만, 헤어져야 했다.
계약직들 연장이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열심히 해왔는데, 기대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못해서 다들 아쉬워했지만, 우리 동기들은 또 새로운 시작을 서로 응원하며 치킨과 콜라로 마음을 털어냈다. 모든 경험은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
이렇게 안정적인 집에 적당한 벌이로 크게 좋거나 그렇게 나쁘지 않은 나의 세팅은 또다시 오래가지 못했다. 자아실현까지는 못해도, 노력하면 늘 결과를 얻어왔던 나의 삶은 이제 경단녀로서의 후속 여파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울해하면 뭐하니 좋은 사람들 만나서 행복한 시간 보냈어 많이 얻은 기다 라는 마음으로 또 나를 토닥토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