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 정착 시도
1년 안에 초등학생 맘의 라이프가 시작될 것이다. 한 번 들어가면, 전학은 없다. 적어도 내 아이에게는. 이 책의 앞부분에 나의 어릴 적 전학 경험에 대한 챕터가 존재한다. 수십 년 기억을 또렷이 꺼내서 쓸 정도라면, 분명 무지하게 인상적이었던 것이고, 안타깝게도 내게는 Negative영역에 가까웠다. 그래서 사실 아이가 6살 후반이 될 때까지, 어떤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단 한 가지 확신한 것이 있었다면, 아이의 인생이 적어도....... 초등학교 전학은 만들지 않으리라! 였다. 그런 마음이 들자. 초등학교 전에 정착할 동네를 찾아야 될 것 같았다.
물론 마곡 국민임대를 살면서 정말 집에서 보이는 3분 거리의 학교를 진학하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첫째는 종종 유치원 바로 옆에 있는 학교를 보며 내게 묻고는 했다.
"엄마. 내가 8살 되면 이 학교 가는 거야?"
"글쎄, 그건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사항인 것 같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명확해질 거야."
일단, 초등학교를 들어간다는 것은 적어도 6년, 두 살 터울인 둘째를 생각한다면 8년을 같은 자리에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8년을 같은 집에 살 수 있을까? 물론, 마곡 국민임대 59F형은 합법적으로 나에게 30년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므로, 뭐가 문제야 라고 누군가는 충분히 되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괜히, 아이 초등학교 가기 전에 다들 무리해서 집을 산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더라. 설명할 수 없는, 곧 7살이 되는 부모의 맘을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공감하시리라. 그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자, 그럼 아이를 어디서 어떻게 키울 건데라는 고민이 따라왔고, 만약 학원비 등 현재 남편의 외벌이를 상회하는 예산을 집행하게 된다면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시댁 친정 옆으로 이사 가서 케어를 부탁해야 될까 등, 정말, 비엔나소시지가 따로 없었다.
일단 마곡을 기점으로 컴퍼스를 한 바퀴 돌려보았다. 김포 풍무 푸르지오, 일산 원흥지구 등. 어디든 너무 멀어지지 않을 수 있는 곳과 친정 시댁과 동생이 있는 영등포, 구로, 양천까지 점점 후보지를 좁혀가며 가격 변동을 주시하기도 했다. 물론, 후보지였던 동네들은 다 방문하여 실제 동선 및 환경을 분석했다. 그러나, 대출을 낸다는 의미는 이자+원금을 매달 갚아갈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중소기업 남편의 월급=한 달 생활비 -끝-
즉, 내가 풀타임으로 일을 뛰어야 삶이 유지가 될 것이라는 팩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북부 쪽 동네들은 집은 좋은 편인데, 육아에 도움을 전혀 못 받으면서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영등포 구로 양천으로 가려면, 30년 이상 된 복도식 아파트 혹은 나 홀로 빌라 등만 해당되는 가격인데, 마곡 새 아파트 59형에 살다가 아, 차마 차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거주지를 결정할 때는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집+일자리+학교를 같이 고려해야 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영끌 (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을 하면서, 우리 가정의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곳을 고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참,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너무 감사하고 분에 넘치는 국민임대 주택에 살아도 내 집이 아닌 것에 이질감이 서걱서걱 밀려온다. 그렇게, 내 표정이 고민에 절어있자, 첫째가 말했다.
"엄마,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 불러줄게요. 우리 동네 이름은 마곡동인데, 아주 아주 좋아요. 정말 좋아요. 커다란 네거리엔 뭐든지 다 있어요. ~”
괜히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하고 있고, 밖에서 태풍이 몰아쳐도 아이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들의 집이 내가 되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마음이 정리가 되고 진정이 되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조급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실질적으로 우리 가정의 미래와 다음 이사를 위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참, 나도 가만히 못 있는 캐릭터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넌 늘 무언가를 하고 있더라.라고 말이다.
내 별명은 야생마였다. 지금은 목줄이 묶여 있음에도 질주 본능이 숨겨지지가 않는다. 지금까지 글에서도 들어 났겠지만, 나는 한 번 목표를 잡으면, 꼭 해내고야 마는 인간이었다. 우리 엄마 말에 의하면, 난 뭐든 배우는 게 느렸다고 한다. 그런데 한 번 재미를 붙이면, 직진만 했다고 했다.
학창 시절에는 젝스키스가 주연한 영화 세븐틴을 보고 백댄서가 되겠다고 춤추다가 경기도 의회상을 받았고, 춤추니까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신 학생부장님 덕에 그다음 시험부터 전교 등수를 한자리로 만들어냈다. 토익 점수 450 점일 때, 객기로 토플 학원 등록해서 6개월 만에 교환학생 자격점수 CBT 213점을 만들어냈다. 그만큼 꽂히면 해내야 마는 진상이었던 것 같다.
이런 역동적인 진상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미치기 더 쉽다. 늘 무언가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데, 육아는 그 무언가에 해당이 안 되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돈이 있었다면, 돈을 펑펑 써서 스트레스를 무마했을 텐데, 현금은 백원도 보기 힘들었던 나의 신혼시절 이야기는 지금 다시 이야기해도 눈물 없이는 이야기를 할 수도 들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우울증에 문 앞에서 손에 잡은 프로젝트가 있었으니 바로 이 임대주택 프로젝트였다. 처음에는 우리 집 하나만 어떻게 해결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시작했고, 그 뒤로는 도움을 요청하시는 분들에게 상담을 해드리기도 했고, 과거 어느 때엔 이런 정보는 너무 필요하다 싶어서 블로그를 쓰기도 했었다. 그러다 임대주택 사는 게 뭐 자랑이라고 그런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글을 거두기도 했었다.
그런데, 방 3개 국민임대까지 오고 나니, 더 이상 이 프로젝트 내에서 목표로 삼을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임대주택을 이용해서 내 상황의 최대치까지 얻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장기전세는 84형, 114형 같은 대형 평수도 있고, 늘 미달에 가까운 강남권 장기전세 등도 여전히 당첨이 가능한 곳들은 존재했으나, 우리 가족에게 마곡 국민임대 59F형은 만족 그 이상의 무언가를 주고 있었기에, 정말 획기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 아니라면 굳이 이사의 필요성을 소환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어디에'라는 질문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미뤄두었던 자아실현 프로젝트에 에너지를 쏟아보는 건 어떨까 하고 주거 프로젝트를 접으려던 찰나였다.